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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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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은밀함이 주는 묘한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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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은밀함이 주는 묘한 매력
  • 변상섭 기자
  • 승인 2023.02.09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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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우 작 화실별견
권영우作 화실별견. 한지에 채색. 112×153㎝.

서양 미술에서 여성 나체는 무한한 미(美)의 원천이자 ‘미의 신’이다. 우주의 미가 집약된 것으로 보고, 절대미의 구현 대상으로 여겼다. 원시시대는 차치하고 누드의 역사가 깊은 것도, 화가치고 누드 작품 하나 남기지 않은 이가가 없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게다.


외설적, 또는 망측스런 존재로 여기는 우리나라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다산을 의미로 원시신앙에서 나체가 등장하기는 했다. 하지만 서양과 달리 나체는 절대 금기 사항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하지 말라면 더하고 싶고, 보지 말라면 더 보고 싶은 게 인간의 본심인 것을... 관음(觀淫) 또는 절시(竊視)의 대상이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음이다. 지체 높은 양반들도 춘화도를 숨겨두고 몰래 아껴보지 않았던가.

권영우(1926-2013)의 화실별견(1956·畵室瞥見)은 우리의 이런 문화적 정서를 함축하고 있는 그림이다.

제목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화실에서 언뜻 보다’라는 의미다. 무엇을 언뜻 보았단 말인가. 그림 속에 답이 있다. 화실별견은 화가가 팔레트를 들고 이젤 앞에서 전라의 여자 모델을 보면서 누드를 그리는 화실 풍경이다. 화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어 자연스러워 보이는 분위기지만 전라의 여체에서 풍기는 긴장감도 팽팽하다.

은밀한 화실을 언뜻 본 시선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대적 배경이 연유를 설명한다. 화가라면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장르가 누드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용인하는 사회적 환경이 아니었다. 외설, 망측스러움으로 터부시됐던 시대다.

모델 구하기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께름칙한 미술이 누드다. 그래서 작가는 온전한 누드 작품이 아닌 제3자를 내세워 엿본 장면이란 기발한 타협책을 찾아낸 게 아닐까. 화실을 엿본 가상의 인물도 내세웠다. 작가는 1인 2역을 한 셈이다.

뒷모습의 여체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정면보다는 부담이 덜하다. 그것은 감상자도 마찬가지다. 당시 염격했던 당국의 검열(?)에서 자유스럽고 반면 여체에 대한 신비감을 고조시키는 효과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근·현대 미술 작품 중 모델이 등을 돌린 누드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화실별견은 누드를 백안시하는 시대상과 작가의 궁여지책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여러 정황과 작가의 기지와 재치를 생각하면서 그림을 보노라면 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한다.

면을 분할한 구성도 재미있다. 어두운 배경에 여체는 밝게 처리해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보는 그리는 작가는 어두운 색의 실루엣으로 처리했다. 관음, 또는 은밀함을 의도한 복선일 것이다.
 

화실별견은 화가가 서른살에 그린 초기 구상작품이다. 
작가는 1960년대 초 붓을 놓고 한지를 이용한 추상 작업을 한다. 한지를 겹쳐 붙이고 찢고, 벗겨내고, 송곳으로 구멍을 낸 흔적을 이용한 작업, 그리고 종이에 칼, 송곳, 도구로 점과 선을 반복적으로 긋고, 흠집난 곳에 청회색 물감, 과슈를 스며들게 하는 기법과 부조적 작업을 통해 새롭고 다양한 작품 세계를 펼쳐 보였다.

전통에 기반한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함으로서 평가가 높은 단색화 화가군(群)에 속한다.  그런탓에 미술시장에서 불루칩 작가로 꽤 주가가 높다.  
 권영우는 함남 이원 출신 실향민이다. 해방 후 국내에서 대학을 다닌 '해방 1세대 작가'로 동·서양화의 경계를 뛰어넘은 폭넓은 작품세계를 펼쳐 근대 화단과 예술사를 대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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