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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이도, 왕건에게 이름을 하사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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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이도, 왕건에게 이름을 하사받다
  •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 대표)
  • 승인 2013.05.13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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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가문…‘이천’은 몽골군 격파 위업


전의이씨의 시조 태사공 이도(李棹)는 전의 운주산 이성(李城)에서 출사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남정할 때 헌책마수(獻策馬首)로 승전하는데 일조했다. 그 공으로 서기 936년 고려개국통합삼한익찬이등공신삼중대광태사전산후(高麗開國統合三韓翊贊二等功臣三重大匡太師全山候)에 사작되었다. 시호는 성절(聖節), 사명된 휘는 도(棹)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이도의 초명(初名)은 치(齒), 시호는 성절(聖節)로 기록돼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甄萱)을 정벌하러 5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금강(錦江)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하여 도강이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치(李齒)는 선박 수백 척을 동원하여 고려 태조와 고려군 5만 대군을 희생자 없이 무사히 금강을 건너게 해주었기에 태조가 도(棹)라고 이름을 하사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그는 전의(全義) 이성산(李城山) 아래로 이거(移居)하여 정착해 세거하였기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전의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또 예안이씨(禮安李氏)가 전의이씨에서 분관(分貫)되었기에 흔히 전의·예안이씨라 부르며, 최근에 전의이씨와 통합했으나 아직도 예안이씨로 통칭되고 있다.

전의, 고려초 중남부 방어의 요지

세종시 전의면 심방리와 전동면 송성리에 소재한 이성(李城, 지방문화재)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편에 "이성은 운주산의 북쪽에 소재한다. 산봉우리에 돌로써 축성하였다. 이도(李棹)가 살았던 고거(故居)로 전해진다. 그 안이 넓고 평평하다. 둘레는 1884척이고 성 안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으나 지금은 못 쓰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에 의하면 태조 왕건은 이도에게 군사적 요충지인 청주목(牧) 전의와 전동 지역 토지와 1000호(전의이씨 기록에는 수천호라 함)의 식읍(食邑 :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리어 그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한 고을)을 하사하고 전산후(全山侯)로 봉하였다. 고려 태조의 봉건 정치 체제하에서는 최고 대우를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도 묘소는 현 세종시 전의면 유천리 양안이 마을에 있으며, 3월 3일과 10월 2일 향사(제사)지내고 있다.
태사공 이도가 식읍으로 받은 지역은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이 이어져 있고 금강 공주, 전의, 전동 지역은 군사적 요충지이기에 후삼국시대의 적전지이다. 특히 후백제 지역의 반항을 제압하여 고려 왕조를 안전하게 수호할 요새지이기 때문에 가장 유능하고 신뢰 할 수 있는 응양대장군(鷹揚大將軍 : 응양군은 고려 때 2군의 하나, 대장군은 종3품) 이도에게 토지를 분급한 것이다. 전의와 전동은 운주산성, 고산성, 증산산성이 이어져 있는 요새지역이다. 이도는 나라의 중신으로 개성(도성)에 주로 거주했지만 식읍으로 하사 받은 전의지역에서 중남부 방어의 소임도 다하였다고 전한다.

첫 국산잠수함 ‘이천함’된 사연


전의이씨 후손 동암수공(東巖公) 이천(李阡)은 1256년 응양위대장군(종3품) 지예부사(知禮部事) 중서시랑문하평장사(정2품 부총리)에 올라 수군 200여 명을 거느리고, 남도인 온수현(현 아산시) 전투에서 몽고병을 격파하고 포로가 된 남녀 100여 명을 구출했다. 그 후 735년이 지난 후인 1992년, 대한민국 국산 해군 잠수함 제1호의 이름을 이천함(李仟艦)이라 정한 이유는 이천의 위훈을 기리기 위함이다. 이천함 내와 육상사무실에 공의 영정(影幀)이 봉안되고 온수현 대첩도가 게시돼 있다.
참고로 지난 1992년 10월 12일 진수한 이천함은 국내 최초로 우리 기술진에 의해 건조된 잠수함이었다. 1200톤급으로 수중 최대속도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항속 16 노트의 위스키(Whisky)급, 로미오(Romeo)급 보다 약 2배 정도 빠르다. 30여 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약 2개월 동안 단독 작전수행이 가능하다. 2002년 10월 취역 10주년 때는 '10만 마일(18만5천200km) 무사고 안전 항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지구 둘레의 네 바퀴 반에 해당하는 거리다.
조선조에 이르러서 고려 화벌 전의이씨는 그 오랜 빛나는 전통으로 세종대왕이 전서공의 증손 휘 정간(貞幹)자헌대부 중추원사 시 효정공에게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으로 정려(旌閭)했다. 이후 전통 세가인 전의이씨는 충효양전(忠孝兩全) 청백절의(淸白節義)한 조선조의 벌열(閥閱)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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