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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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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교감
  • 송길룡
  • 승인 2016.05.26 1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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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노트

그 옛날 <퐁네프의 연인들>(1991)에서 괴물 같은 얼굴로 어여쁜 방황소녀 줄리엣 비노슈를 쫓아다니던 드니 라방, 아~ 이제 얼굴에 나이가 나타나는구나! 얼마 전 손꼽아 기다리던 영화 <홀리 모터스>(레오스 카락스, 2012)를 봤다. 매우 독특한 외모와 에너지를 발산하는 프랑스 배우 드니 라방이 등장하는 첫 장면을 보며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이 느낌은 얼굴에 나이 들어가는 티가 처연히 나타나는 사람들을 추하게 보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좌충우돌하는 젊음의 탱탱하지만 불안정한 피부의 색감이 사라지고 세월의 부딪힘을 견뎌내고 또 견뎌내면서 비교적 안정감을 갖춰가며 삶을 지탱해온 중년의 얼굴 매무새를 일컬음이다.

수다를 떨고 싶었다. 좋은 영화들, 보고싶은 영화들을 보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득의 언사들을 늘어놓고 다니다가 어느 사이 ‘평론가’라는 딱지를 주제넘게 들어가며 영화글을 쓰는 요즘이다. 목소리에서 근엄을 빼버리고 무엇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맨가슴에 그대로 남은 느낌을 말하고 싶었다. 입술에 침 발라가며 흥미진진했던 장면들에 대해 매혹과 감격의 흥분들을 쏟아놓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를 이야깃거리 삼아 두런두런 모여든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홀리 모터스>가 내게는 행복감을 주는 영화라고 소개했을 때 사람들은 보지 않은 영화, 쉽게 볼 수 없는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단 5초도 이어가지 않았다. 맞다. 같이 보지 않았어도 서로 각자 관람한 동일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맞장구가 오래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는 때로 여행과 같다. 누가 어디 멋진 곳을 여행하고 돌아와 친구들에게 그곳에 가보라고 권유하며 그곳에서의 멋진 풍광을 설명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시라.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여행자의 흥분감을 나눠가지는 그 교감의 분위기를 상상해보시라. 경비가 얼마나 들었냐는 질문을 하는 자는 두고두고 타박을 들을 기세. 그런데 그런 문화적 분위기가 변했다. 갈 수 없는 여행지를 다녀온 여행자의 얘기는 따분하게 여겨진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우리들의 문화 속에는 보지 않은 영화, 볼 수 없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외면하는 습성이 생겼다.

<홀리 모터스>에서 드니 라방은 주문을 받아 하루에 9가지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전직배우로 분장하고 연기한다. 한번은 길거리 걸인이 되고, 한번은 통제할 수 없는 광기어린 괴수가 되고, 때로는 암살자에 희생자에 심지어 임종을 맞는 부자노인이 되기도 한다. 잠시동안 다른 이들의 삶을 대신 살며 짜릿한 삶의 역동성을 느끼지만 또한 하나의 캐릭터에만 머물 수 없는 아쉬움에 허탈감도 크다.

영화니까 영화속 상상이니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볼 수 있다. 살아보니 어떤 삶은 즐겁고 어떤 삶은 쓰라리다. 하지만 그 모든 다른 이들의 삶이란 옳고 그름의 잣대로 편가를 수 없는, 그 자체로서 인간적 삶의 총체를 이룬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떤가. 실제로 내가 남의 인생을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일 가능한 구석이 있다면 바로 남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처럼 듣는 것 정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내가 가질 수 없는 다른 이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연습이 따로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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