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88서울 올림픽 성공과 북방 외교정책, 재평가 받아야"
상태바
"88서울 올림픽 성공과 북방 외교정책, 재평가 받아야"
  • 이계홍
  • 승인 2021.10.27 08:4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필의 시선] 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를
1989년 헝가리 항공협정서명식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대통령 기록관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보통 사람’이자 ‘1노3김’의 마지막 주자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타계했다.

하필이면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날 별세하자 필자는 이 소식을 전한 이에게 박정희 대통령 서거날을 잘못 말한 것이 아니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참으로 공교로운 죽음이라는 생각을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별세로 김대중(2009년), 김영삼(2015년) 전 대통령과, 김종필(2018년) 전 총리와 함께 1980년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던 ‘1노 3김’ 시대도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본격적으로 다뤄질 시작점이 될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집권 시절 “보통 사람의 시대”를 내세웠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라는 닉네임을 스스로 즐겨 사용했다. 실제로 그는 ‘보통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사람’이라는 탈권위 의식이 ‘물태우’라는 또다른 별명을 얻는 계기도 되었다. 이는 주로 3당 합당한 김영삼(YS) 계열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된 별칭이기도 하다. 그는 집권 말기 자당 내 YS계로부터 모욕을 당할 정도로 배척당했다. 

노태우는 민주 정통정부라는 YS 계열로부터 숙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1995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 전두환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대법원의 반란수괴 등에 관한 판결로 징역 17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할을 했다.  

노태우 대통령 올림픽담화발표모습2(1988) ⓒ대통령 기록관

노 전 대통령은 굴곡진 역사에 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지만 과보다 공이 더 많이 묻힌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과는 대부분 전두환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숙명론적 한계’이고, 공 또한 전두환의 후계자라는 인식 때문에 도매금으로 매도된 후과 때문이다. 

그러나 노태우를 생각하면 88서울 올림픽 성공과 북방 외교정책 성과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988년 9월 치러진 서울올림픽은 우리의 국격과 위상을 세계에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반쪽짜리 올림픽을 온전한 올림픽으로 만든 전환점이 되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냉전 대립중이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았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그 보복으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 진영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았다. 이런 ‘옹졸한 반쪽짜리 올림픽’을 서울올림픽에서 말끔히 씻어내 자유진영, 공산진영 모두 참가하는 인류 최대의 평화 제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것을 노태우 정권이 만들어냈다. 세계사적 외교 성과인데 묻혀버렸다. 냉전의 한 복판에 있는 분단국가가 주도적으로 자유·공산 진영 국가를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한 외교력은 세계 정치사가 평가할 업적이다. 이 외교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소련과 국교를 트고, 중국과 수교했다. 제3세계는 물론 여타의 공산국가와도 수교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90년 12월 노 전 대통령은 소련을 방문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1991년 9월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이루어내고, 중국과도 수교했다. 이에 앞서 △1988년 7·7 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1990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다. 그는 무엇보다 통일정책에 적극성을 보이고, 남북 교류의 초석을 깔아놓았다.  

보수 정당 대통령이란 인물이 이렇게 선제적으로 북방정책을 편 것이 묻힌 것은 보수 정당 자체의 한계 때문이다. 민자당-자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국민의 힘으로 이어진 보수 정당은 남북 화해와 협력의 정신을 한사코 배척하거나 묵살했다. 그러니 그들 스스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업적을 지워버린 것이다. 

노태우의 북방 외교에 힘입어 뒤이은 김영삼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진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이 주춧돌을 놓아 김영삼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 대에 결실을 맺어 김정일과의 첫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물론 북한 핵과 군사분계선 도발로 남북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경우도 많았지만, 남북 화해의 역사적 물줄기를 바꾼 것은 노태우 정권의 업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것이 모두 묻혔다. 이제부터라도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이유다.  

1996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
1심에서 전두환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 노태우는 당시 유기징역 최고형량인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 발췌

노태우에게 과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암살된 직후 1979년 12.12 군부 쿠데타로 전두환과 함께 정치 권력을 찬탈한 죄과는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육군 9사단장이던 1979년 12월 12일 육사 11기 동기생이자 친구인 전두환과 함께 한 신군부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 나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을 떠받치는 2인자가 되었다. 전두환에 이어 13대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그러나 전두환 정부 2기를 이끌 것이라는 관측과 달리 나름의 개성있는 정부를 만들었다. 북방 외교정책과 의미있는 국정 성과를 이룬 것이다. 수도권 5개신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KTX) 건설,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것 등이다. 

그 과정에서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폭등하고 정경유착이 심화됐으며, 수서·한보 등 대형 비리 사건들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 야당의 득세로 ‘식물정권’이 된 현실을 뚫기 위해 3당 합당을 한 결과, 극도의 지역분열과 인위적 정계개편의 후유증을 남겼다.

그의 재임기에는 억눌려 왔던 각계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면서 노동계 파업 등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두환과 함께한 12.12 군사반란 참여와 5.18 유혈진압, 수천억에 이르는 비자금 조성이 피할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29만원 밖에 없다며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은 전두환과 달리 2700억원의 추징금을 분할해 완납했다. 병 중인 자신을 대신해 아들 노재헌씨가 5.18 민주묘지를 찾아 영령에 참배하고,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했다. 역사에 대한 반성과 자기 성찰을 보여준 단면이다. 

필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이제 재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전두환의 2인자가 아니라 비록 힘없는 ‘물태우’였지만, 보수 정당의 한계를 넘어 북방 외교를 적극 펼치고, 88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국격을 온 세계에 선양했으며, 직선제 대통령제를 도입한 업적을 다시 평가하자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웃기네ㅋ 2021-10-27 09:02:56
국격 ㅋㅋ
3당 야합이나, 비자금으로 국격 드높였나?;;; 어이가 없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