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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의 솔로대첩 다리 밟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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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의 솔로대첩 다리 밟기
  • 정규호
  • 승인 2012.12.2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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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나름 훈훈한 기운이 가득한 연말연시가 다가오고 있다. 특히 올 해 처음으로 시행된 ‘솔로대첩’은 사회적으로 큰 화두를 모았다. 현대사회에 새로운 풍속이 탄생된 샘이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성탄절를 지내면서 시작되는 송년과 신년맞이 풍속은 연인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축제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솔로대첩은 크리스마스 이브가 연인들끼리 더욱 돈독한 사랑을 쌓는 날로 인식되고 연인끼리 추억을 쌓는 다양한 데이트문화가 성행하면서, 반면, 솔로에겐 매우 쓸쓸한 날인데, 여기에 착안되어 생성된 새로운 풍속이라 할 수 있겠다.

전통사회에서도 솔로대첩과 의미가 상통하는 세시풍속이 있었다. 시기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남녀의 만남이 자유롭지 못했던 전통사회에서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나 평소 마음에 담아 둔 연인을 자연스럽게 스킨 쉽을 하고 마음을 전달 할 수 있는 자리가 세시놀이를 통해서 이뤄지고 있었다. 새해가 시작되면 전국적으로 성행했던 ‘다리 밟기’ 풍속이다.

답교(踏橋)놀이라고도 하는 다리밟기 풍속은 이웃마을과 지리적 또는 상징적 경계가 되는 다리에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풍물과 함께 춤을 추며 즐겁게 거닐며 놀던 놀이이다. 다리라는 정해진 공간에 서로 오가며 부디끼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마음에 둔 연인의 옷깃을 스치고 눈빛으로 마음을 전달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샘이다.

이러한 다리밟기 풍속에 대하여 조선 선조(宣祖) 때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답교지희(踏橋之戱)’라 하여 고려시대부터 전래된 풍속이라 전하고 있는데, "정월 대보름날 남녀가 쌍쌍이 짝을 지어 밤새도록 다녀 거리가 혼잡하여 여자들의 다리 밟기를 금하기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일부 양반들은 번잡을 싫어하여 대보름을 피해 14일 밤에 했는데, 이것을 ‘양반다리밟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엽 이후 차츰 부녀자들이 다리 밟기를 하면서 여러 병폐가 생김에 따라 부녀자들의 다리 밟기는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한편 다리밟기의 기원에 대하여 유득공(柳得恭)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중국의 여러 서적을 인용하여 "『북경세시기(北京歲時記)』에 정월 대보름날 밤에 부녀자들이 모두 집에서 나와 다리를 거닐었다."고 하였다. 또한 정월 초에는 "달이 뜬 뒤 서울 사람 모두가 종가(鐘街, 지금의 종로)로 나와 종소리를 듣고 헤어져 여러 다리를 밟는데, 대광통교(大廣通橋)ㆍ소광통교(小廣通橋)ㆍ수표교(水標橋)에 가장 많이 모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이날 열두 다리를 건너면 일년 열두 달 동안의 액을 막는다고 하여 재상귀인(宰相貴人)으로부터 미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다리 밟기를 했다."고 하며,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는 "정월 대보름날 부녀자들이 서로 이끌고 밤에 나와 다님으로써 질병을 없애는 것을 주백병(走百病)이라 한다."고 했다. 이렇듯 다리밟기는 다리를 밟음으로서 일년 간의 바리병을 없애고 액을 면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는데, 형태는 다르지만 전국적으로 행해진 풍속이였고, 오늘날 까지도 무형문화재로 승화하여 전승의 맥을 이어 오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

영동지방에서는 노인이나 다리 병을 앓는 사람들만이 참여하고 있어 다리밟기가 언어질병적(言語疾病的) 치유 심리가 작용하여 건강의 징표가 되며, 주술적 행위를 통한 장수의 기대심리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북지방에서는 자기 나이 수만큼 왕복해야 무병장수한다고 여겨 다리밟기를 하였으며, 경기도 광주에서는 부녀자들이 음식물을 냇물에 던져 복을 빌기도 하고 남자들은 농악을 앞세우고 무동(舞童)을 세워 다리 위에서나 다리 근처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게 지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다리밟기는 남녀노소가 모여 흥겨운 놀이를 즐기는 축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다리밟기를 마치고 나서 입고 있던 저고리의 동정[襟]을 뜯어 엽전(葉錢)과 함께 싸서 다리 한구석에 놓아두거나 다리 아래로 던져버리는 신앙적 행위도 전해지기도 하였다. 서울 송파에서도 이와 유사한 풍습이 전해지는데, 무동답교놀이패들이 낮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하고, 저녁에는 달집을 태우고 짚불을 돌리며 놀다가 달이 떠오르면 다리를 밟으면서 음식을 한지에 싸서 다리 밑에 던지고 달을 향해 두 손 모아 빌며 ‘달님소원빌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송파답교놀이는 오늘날까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전승의 맥을 잇고 있다.

한편 다리를 건너는 방법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달랐는데, 다리를 모조리 건너기도 하고 열두 다리를 건너기도 하였으며, 다리 셋만 건너거나 제일 큰 다리나 가장 오래된 다리를 나이 수대로 왕복하는 곳도 있었다. 이 밖에도 다리를 건너는 동안 횃불을 들고 다니다가 그 횃불이 나이 수를 채울 때까지 꺼지지 않으면 행운이 온다는 지방도 있었으며, 건너서 돌아오는 다리는 다른 다리를 택하는 곳도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신년맞이 풍속인 다리밟기는 사람의 다리[脚]와 물 위의 다리[橋]가 같은 음을 지닌 데서 비롯된 것으로 다리를 밟으면 한 해 동안 다리의 병을 피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크게 성행하였으며, 남녀노소 모두 나와 보름달을 즐기면서 서로 부디끼며 어우러졌던 축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의 만남은 인륜지대사를 위한 성스러운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짚신도 짝이 있다’라는 속담은 서로 좋은 만남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이며, 개인주의 보다는 서로 인연을 맺고 연결고리를 채워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공동체의식의 한 단면이다. ‘다리 밟기’와 ‘솔로대첩’의 놀이형태는 달라도 그 이면에 있는 정신은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우수한 정신문화를 영위한 우리 조상들의 전통가치관이 현대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새로운 풍속으로 재창출되고 있다.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공유하면서 한 해를 되돌아 보고 신년를 설계하며, 새해를 맞이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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