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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 없는 세상에 대한 헛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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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 없는 세상에 대한 헛된 복수
  • 이환태
  • 승인 2017.03.12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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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태의 인문학여행] <4>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영국의 19세기 소설가들 중 브론테 자매들(Bront sisters)이 있다. 한 집에서 작가가 하나 나오기도 힘든데, 이 세 자매는 고만고만한 또래의 자매들이면서도 각자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겼다.


이들은 영국 요크셔 지방의 황량한 습원 한쪽에 위치한 하워스(Haworth)라고 하는 조그만 도시의 언저리에 있는 목사관에서, 오로지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책을 읽는 일과 그 벌판을 쏘다니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는 고립무원의 삶을 살다간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미미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쓰고 그걸 돌려 읽고 다듬은 후 각자의 필명으로 출판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가히 걸작이라 할 만하다. 그녀가 서른의 나이에 저세상으로 떠나기 전까지 집에만 있었던 노처녀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 작품은 격정적인 인물들과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요크셔 지방은 여러 개의 강이 모여 동북쪽의 바다로 빠져나가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광활한 지역이 온통 낮은 구릉을 이루며 펼쳐져 있는데, 그 땅은 푹신푹신한데다가 습기를 머금고 있어서 농사를 짓기 힘든 황무지다. 겨울이면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높은 산이 없어 눈이라도 내리면 그곳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지척을 분간하기도 어려운 곳이다. 그곳에 한 장원(莊園)이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워더링 하이츠다. 고유명사이니 번역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번역한다면 폭풍의 언덕이다.

 

 

그 집의 주인 언쇼(Earnshaw)는 어느 날 인근의 리버풀에 갔다가 집도 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집시 고아를 데려와 히스클리프(Heathcliff)라고 이름지어주고 친아들처럼 키운다. 그에게는 이미 힌들리(Hindley)라고 하는 아들 하나와 캐서린(Catherine)이라고 하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힌들리가 히스클리프를 아주 싫어하는 것과는 달리 캐서린은 그를 아주 좋아하여 두 사람은 습원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사랑을 싹 틔운다.


아버지 언쇼가 죽고 힌들리가 가장이 되면서 히스클리프는 하루아침에 양반집 자제에서 그 집의 하인으로 전락한다. 히스클리프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그가 더 이상 마음대로 캐서린과 어울릴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방해물이 나타나면 그 사랑이 더욱 불붙듯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이 일로 오히려 더 가까워진다. 두 사람 모두 황량한 겨울 들판에서 거칠게 불어대는 바람처럼 만만치 않은 성격이어서 웬만한 강압 따위에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정신적 일체감이 더 커져서 상대방이 오히려 “자신보다도 더 자기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가 된다.


두 사람이 수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장원인 스러쉬크로스 그레인지(Thrushcross Grange)에 갔다가 캐서린이 그 집의 개에 물리는 일이 일어난다. 몇 주 동안 그 집에 머물게 되면서 얌전한 숙녀가 되어서 돌아오는데, 그 때부터 모든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마음속으로는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면서도 캐서린은 그 집의 아들 린튼(Linton)과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그 사실을 안 히스클리프는 아무 말 없이 워더링 하이츠를 떠나고, 3년 만에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돈 많은 신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가 돌아온 지 얼마 후 캐서린은 린튼의 아이를 낳고 곧 세상을 떠난다. 그 때부터 히스클리프의 복수가 시작된다. 그는 노름에 빠진 힌들리에게 돈을 대줌으로써 워더링 하이츠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린튼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는다. 약골인 그 아들이 거의 죽기 직전인데도 캐서린의 딸 캐씨(Cathy)와 반강제로 결혼시킴으로써 그는 스러쉬크로스 그레인지도 수중에 넣는다.


그러나 캐서린이 없는 세상에 대해 아무리 복수를 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날, 습원을 밤새 쏘다니다가 전에 없이 밝은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드디어 눈을 감는다. 그는 아마 예전에 캐서린과 만났던 그 언덕에서 캐서린의 혼령과 곧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지도 모른다.


적지 않은 인간의 문제가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아마 사랑이 합일(合一)을 지향하는데 반해, 몸은 둘로 떨어져 있는 인간의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 소설을 읽을 적마다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원래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한 몸을 이루고 있었는데, 신들이 이를 질투하여 몸이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그 뒤로 인간은 자기의 반쪽을 그리워하며 평생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믿을 수 없는 얘기지만, 인간의 사랑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한 이야기다. 사랑은 상대방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거의 모든 문제는 또한 상대방이 내가 아니라는 데에서 비롯된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생기는 합일의 환상은 실제로는 둘인 몸뚱이가 겪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세상 경험도 없이 오로지 목사관의 작은 방에서 마음만으로 바깥세상을 관조했던 서른 살 노처녀, 그녀가 어떻게 이런 인간이 안고 있는 중요한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보았을까. 그것은 아마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인 아버지의 훌륭한 서재에 그 답이 있을 것 같다.

 

좋은 서재를 물려주고 마음껏 읽게 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교육인데, 요즘은 아이들이 책 읽을 시간도 없이 쫓기는 공부만 하는데다가, 자주 이사하는 탓에 이삿짐 부피 늘리는 데 일조하는 것이 그것이니, 이래저래 책이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참 쓸쓸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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