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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강아지의 죽음과 소년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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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강아지의 죽음과 소년의 눈물
  • 이환태
  • 승인 2017.03.0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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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태의 인문학여행] <3>스티븐 크레인의 ‘검정 강아지’

아들 녀석이 애지중지하던 강아지를 떠맡아 기르게 되었다. 평소 강아지를 보면 예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걸 애완동물로 키울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한 몸 추스르기도 버거운데, 자식도 아닌 것이 자식 키우는 것 못지않게 품이 들어가는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릴 적부터 잘 길들이지 못해서 여기저기 실례를 하고 다니는 녀석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런데도 난 아직 그 놈을 정성껏 거두고 있다. 우연히 내 집에 들어온 녀석이지만, 그놈도 생명 가진 놈이기 때문이다.

    

평소 무언가에 정을 두기에는 식물을 키우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양지바른 곳에 놓아두고 가끔씩 비료와 물만 주면 잘 자라주고 예쁘고 향기 나는 꽃을 피워줄 뿐 무엇을 요구하는 법이 없으니, 그 보다 좋은 애완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강아지를 품에 안고 다니고, 그 녀석이 죽으면 슬피 울 뿐만 아니라 사람에 뒤지지 않는 장례를 치러주고, 심지어는 상실감에 심한 우울증까지 겪는다는 말을 들을 땐, 거기엔 뭔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더 많았다. 그런데 우연히 얻게 된 강아지를 키우면서 내 생각도 남들의 생각도 다 옳다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 녀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아지를 떠맡았지만, 비교적 쉽게 그 녀석과의 동거에 적응한 것은 아마도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크레인(Stephen Crane)의 단편소설 ‘검정 강아지(A Dark Brown Dog)’의 영향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집 강아지가 바로 이 소설에 나오는 그 강아지 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온통 새카만 것이, 누구든 그 녀석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측은한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게 생겼다. 사람 사이에서도 불쌍하게 여기다가 정들고 사랑이 싹트고 결혼까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모두 일하러 나가서 혼자 남겨진 어린 소년이 늘 돌아다니던 동네 골목에서 우연히 길 잃은 강아지와 조우한다. 소년은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이 그 강아지를 쓰다듬어주고 한 동안 함께 놀아준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서려는데, 강아지가 그를 따라온다. 돌멩이를 집어던져도 그 강아지는 목줄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필사적으로 그를 따라온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데리고 가는데, 저녁에 일터에서 돌아온 가족들 사이에 온통 난리가 난다. 사람 먹고 살기도 힘겨운데, 강아지가 웬 말이냐는 것이었다.

    

그 강아지를 머물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나중에 들어 온 그 집의 가장이었는데, 그가 그렇게 결정한 것은 그에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어린 아이를 존중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언제나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마누라의 결정에 반대되는 결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어린 소년을 제외한 다른 식구들에게 그 강아지는 언제나 천덕꾸러기였다.

    

그러나 소년과 강아지 사이엔 주군과 신하의 관계와 같은 것이 형성된다. 소년이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주군의 행차를 수행하는 신하로서의 자긍심 같은 것이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서는 강아지의 태도에서 엿보일 정도였으며, 강아지에게나 소년에게나 둘은 없으면 못 살 정도의 관계가 싹트게 되었다. 다른 식구들이 강아지를 괴롭히기라도 할라치면 소년은 용감하게 나서서 그를 보호하곤 하였는데, 그 기세가 하도 등등하여 누구도 감히 소년 보는 데서 강아지를 괴롭히려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만취한 소년의 아버지가 주정과 행패를 부리다가 그 강아지를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린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말 못하는 짐승 하나를 죽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년과 강아지 사이에 형성된 한 왕국을 짓밟은 것이자 소년의 꿈을 깡그리 깨어버린 것이었다.

    

아직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내리지도 못하는 어린 소년이 5층에서부터 강아지가 떨어져 누워있는 곳까지 가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죽은 강아지 옆에서 눈물 흘리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아마 그 소년은 평생 자기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검정 강아지는 노예로 팔려와 미국에서 살고 있던, 해방되기 전의 흑인을 상징한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찮은 미물이라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인정이며, 그걸 키우지 않는다면 모르되, 키우기로 했으면 한 식구로 여기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미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또한 나와 관계없는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의 출발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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