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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존경받아야 할 삶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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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존경받아야 할 삶의 태도
  • 정은영
  • 승인 2016.12.2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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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영의 미술사산책] 샤르댕의 정직함

“도대체 정물화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오랜 만에 전시회 구경을 간 지인은 활기 넘치는 생생한 그림들 사이에서 이름 그대로 ‘정지해 있는 죽은 사물들을 그린’ 일군의 정물화(still-life painting)를 보고 매우 의아했던 모양이다. 극적인 사건도 없고 근사한 인물도 없이 한갓 물병이나 그릇들 혹은 과일 몇 알이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모습을 그렇게 열심히 그려놓은 이유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회화의 여러 장르 중에서 정물화만큼 단순하고 밋밋한 것도 없다. 더욱이 17~18세기를 풍미했던 역사화(history painting)와 비교한다면 정물화는 참으로 평범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다. 당시 역사화는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에 고전주의 형식을 사용하여 역사나 신화의 내용을 주제로 한 고귀한 사상을 전달하는 장르였다. 내용의 중요성에 맞게 캔버스의 폭이 4~5미터에 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반면 정물화는 그려진 대상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물건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크기 또한 작고 소박했다. 그런 이유로 유럽의 전통적인 아카데미가 세운 장르의 위계서열에서 이들의 위치는 자명했다. 17세기 이후 거의 200여년이 넘도록 지속된 이 장르의 질서에서 역사화는 항상 최상위에, 정물화는 여지없이 최하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정물화가 장-밥티스트-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Simon Chardin)의 그림은 그 어떤 위대한 역사화보다 깊은 감동을 준다. 영국 옥스퍼드의 애쉬몰린 박물관(Ashmolean Museum)에 소장된 샤르댕의 ‘청어가 있는 정물’은 그 어떤 역사화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지한 삶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폭이 40㎝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화면에 부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수수하게 그려져 있다. 갈색 톤의 조리대 위에 검은 도기 물병과 철제 솥, 두툼한 손잡이가 달린 수프 냄비와 주전자 같은 요리 도구들이 놓여 있고, 그 도구들과 함께 붉은 색을 띤 생고기 덩어리와 하얀 계란 두 알, 그리고 길게 매달려 있는 말린 청어 서너 마리가 보인다. 조리대와 뒷벽이 모두 대지의 흙을 연상시키는 갈색으로 일관되어 있어 이 도구와 식재료들이 모두 대지와 자연으로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성실한 노동으로부터 얻어진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수평과 수직, 곡선과 직선, 밝음과 어둠, 돌출과 깊이가 아름답게 균형을 이룬 이 그림에서 샤르댕은 그 어떤 화려한 수사학이나 경탄을 자아내는 기법도 쓰지 않았다. 수수한 붓질은 오히려 투박할 정도여서 치밀하게 계산된 공간의 뛰어난 질서 감각이 강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일상의 사물에 마치 경의를 표하듯이 대상 하나하나의 질감과 형태를 진지하게 다루었지만 그 물건들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보다 더 멋있게 꾸미거나 화려하게 변형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물건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바로 그 적절한 관계로 말미암아 각각의 존재들이 자체의 존엄성을 드러낸다.


샤르댕의 정물화가 주는 감동은 간결하고 소박한 일상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간직한 바로 그 방식에 있다. 눈부신 솜씨를 뽐내지 않고 화려한 붓질도 구사하지 않는 샤르댕의 그림은 회화의 모든 권위를 존재하는 작은 것들에게 이양한 듯하다.


한 미술사학자는 샤르댕의 정물화가 지닌 이런 특성을 ‘정직함’이라 불렀다. 샤르댕의 ‘정직함’은 그가 활동한 시기가 지극히 화려하고 귀족적인 로코코 시대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 함의가 더욱 커진다.


귀족들의 겉치레와 사치가 극에 달해 있었던 그 시기에 샤르댕의 정물화에 담긴 소박한 물건들은 당시 신흥 중산 계층의 성실한 노동과 검소한 생활에 깔려 있던 정직의 미덕을 조용히 증언한다. ‘정직함’이야말로 가장 존경받아야할 삶의 태도임을 그 흔한 미사여구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게 증언하는 듯하다. 샤르댕이라는 이름이 시대나 장르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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