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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슬픔이 힘이 돼야 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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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슬픔이 힘이 돼야 하는 까닭
  • 정은영
  • 승인 2016.12.13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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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영의 미술사산책]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우는 여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사라진 날이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지만 그 날 꽃도 못 피우고 진 청춘에 대한 애도와 우울,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정부에 대한 분노와 절망은 가시지 않고 있다.


애도와 우울은 깊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공유하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주지하듯이, 애도(mourning)는 죽음으로 인한 소중한 존재의 부재(不在)를 아파하며 그 존재를 고이 떠나보내기 위한 ‘적극적인’ 슬픔의 행위다.


반면 우울(melancholy)은 그 소중한 존재의 부재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음으로 인한 부재를 지속적으로 슬퍼하며 그 존재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소극적인’ 상태에 가깝다.


말하자면 애도가 떠난 이를 보내고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적극적인 이별 의식(儀式)이라면, 우울은 그러한 이별을 하지 못하는 상태, 즉 충격적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 상태라 할 수 있겠다.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고 세월호에 대한 진실 규명이 다시 조명 받으면서 지금 우리는 심각한 우울의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고통과 아픔에 대한 예술의 치유 작용을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예술은 인류의 비극에 대한 적극적인 애도 행위이자 창조적인 이별 의식이며 아름다운 기억의 수단이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1814)가 그러하고,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1818)이 그러하며,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가 그러하다.

 


특히 스페인 내란 중 독재자 프랑코 장군을 지원한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수백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비극을 기록한 <게르니카>는 20세기 최고의 기념비적인 역사화라 할만하다.


요즘 부쩍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피카소의 <우는 여인>은 <게르니카>로부터 나온 그림이다. 세로 60㎝, 가로 50㎝ 정도의 아담한 크기를 지닌 이 그림은 <게르니카>가 완성된 후 4개월이 지난 1937년 10월에 그려졌다.


<게르니카>의 왼쪽 끝에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을 독립시켜 십여 점에 달하는 <우는 여인>을 제작한 것이다. 그 폭이 8미터에 가까운 대작인 <게르니카>에서 유독 ‘울부짖는 여인’의 모티브를 작은 그림에 다시 담은 것은 그 이미지야말로 당시의 비극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에 소장된 이 그림은 십여 점의 연작 중 마지막 작품으로 이전의 소묘나 회화보다 완성도가 높은 수작으로 평가된다.

 


흐느끼는 여인의 얼굴은 슬픔과 아픔으로 산산이 조각나 있다. 여인의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날카로운 고통의 결정체가 되어 얼음 조각처럼 부서져 내리고, 고통으로 울부짖는 입은 찢어져 나오는 절규를 막으려는 듯 가까스로 움켜쥔 손수건을 힘껏 악물고 있다. 주황과 파랑, 노랑과 연두 등 강렬하게 빛나는 화려한 색상은 깊은 슬픔으로 산산조각이 난 형태와 기이한 대비를 이루며 삶의 부조리를 역설하는 듯하다.


피카소가 이 그림의 모델로 삼았던 인물은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 사진작가 도라 마르(Dora Maar)였다. <게르니카>의 제작과정을 생생한 사진으로 기록한 초현실주의 예술가 도라 마르는 피카소에겐 항상 ‘우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여인을 애인으로 두었던 피카소였지만, 도라 마르라는 한 개인 속에서 여성이라는 보편적인 존재의 고통과 슬픔을 직관적으로 감지했던 모양이다. 그의 <우는 여인>이 단순한 개인의 초상화가 아닌 이유다.


하나의 그림이 무슨 위로가 될까마는, <우는 여인>을 보며 생각한다. 슬픔도 힘이 될 수 있을까. 무기력한 우울을 넘어 서로 안고 슬퍼할 때, 슬픔은 힘이 된다. 끝없는 절망에서 작은 희망을 길어 올릴 때, 슬픔은 힘이 된다. ‘흐느끼는 여인’의 고통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진정으로 슬픔은 힘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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