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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회에 대한 ‘동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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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회에 대한 ‘동상이몽’
  • 유현주 미술평론가(미학박사)
  • 승인 2016.10.28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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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주의 문학과 미술 사이 | 백남준과 헉슬리

백남준, 비디오아트로 매체 비판 태도 견지
첫 인공위성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 통해
기술 지배 역이용한 ‘창의적 예술경험’ 시도


최근 대전시립미술관에서 <더 브레인>이라는 과학과 예술이 융합된 프로젝트 전시를 오픈했다. ‘뇌’를 주제로 한 이 전시의 오프닝 퍼포먼스가 매우 흥미로웠는데, 첼로와 전자음악의 협연 그리고 마치 연주자의 뇌파를 찍어 전달하는 것 같은 디지털영상이었다. 오감으로 전달되는 이러한 미술 퍼포먼스가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63년 백남준은 그의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 음악을 ‘전시’한다는 표현을 이미 사용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융합적 예술의 선구자였던 백남준의 예술에서 우리는 기술에 대한 긍정 이전에 비판적 견해를 가졌던 사람이 바로 백남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텔레비전의 일방소통과 자본화된 대중문화로부터 우리의 눈과 귀가 마비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백남준은 1963년 독일의 부퍼탈 화랑에서 열린 전시에서 전시장 바닥에 놓인 12대의 텔레비전을 관객이 밟아야 작동이 된다거나 다이얼을 돌리면 화면이 캔버스의 유화처럼 변형되는 등 텔레비전의 일방적 소통을 지양하고 관객에 의해 반응하도록 했다.

이 전시는, 백남준 연구가 에디트 데커에 따르면, 백남준의 매체 비판적 태도를 보여준 비디오아트의 대표적 예이다. 백남준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점차 기술사회가 가져올 새로운 전체주의의 도래, 테크놀로지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장악해 가는지에 대해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염려스러워했다. 실제 1960년대 완벽한 상업화를 이룬 텔레비전이 하루 평균 7시간이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백남준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는 텔레비전이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의 텔레스크린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의 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뿐 아니라 뇌 속까지 깊이 장악하려는 감시자의 눈 말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는 기술문명 사회에 대해 매우 개연성 있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1932년에 쓰인 이 소설은, 가장 효율적인 사회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인공부화로 태어난 인류가 주어진 자신의 계급을 지키며 평화롭게 유지되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인문과학적 지식을 탁월하게 적용해 가히 실험적이라 할만한 ‘멋진 신세계’를 창안해낸다. 생물학자인 형과 노벨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동생, 진화론을 발전시킨 조부, 그리고 영문학을 공부한 시인 어머니를 둔 가문의 후손답지 않은가.

그 소설에서 인류는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계급으로 분류되어 병 속의 태아 때부터 그에 맞는 조건반사교육을 받음으로써 완벽하게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영양소와 공기량 주입을 조정해 생산되는 계급사회는 갈등 없는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되, 간혹 우울한 마음이 들면 ‘소마’라는 마약을 먹을 수 있다. 부모가 아닌 인공부화로 생산된 인간 모두는 “공유-균등-안정”이라는 표어와 “만인은 만인의 소유”라는 신조 아래 자유롭게 누구와도 섹스가 가능하며, 모두 젊음을 유지하다가 일정한 때에 죽는다. 주인공들인 버나드와 레니나는 이 문명국을 벗어나 뉴멕시코의 인디언 보호구역, 즉 야만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이들이 만나게 된 존은 헉슬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즉 기술문명 사회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존은 문명국에서 토마스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임신한 채 뉴멕시코로 불시착해 살아온 여성 린다의 아들이다. 그는 린다와 함께 결국 문명국으로 귀환하게 되지만, 이 신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종교가 자동차 대량생산의 기업가 헨리 포드를 숭배하고, 셰익스피어를 모르는, 즉 시와 자연에 대한 가치를 모르는 사회라는 점에 경악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존이 살던 야만국 역시도 어머니 린다를 강간하고자 했던 사람들, 폭력, 배고픔 등의 기억을 보여줌으로써 헉슬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존재 자체의 욕망과 이기심 및 야만성을 은연중 토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조지 오웰과 마찬가지로 헉슬리 역시 기술 지배의 사회가 갖는 전체주의의 성격을 예시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독창성과 자율성보다는 효율성을 최고조로 높이기 위한 산아조절, 소수의 지배계급과 다수의 피지배계급의 분화, “우리는 행복하다”로 밤마다 인공부화된 태아들에게 주입되는 세뇌교육 등 흡사 여전히 건재 하는 독재국가들의 모습보다도 더욱 지능적이고 과학적이다.

미래의 기술사회에 대한 백남준의 대답은 결과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1984년 백남준은 최초의 인공위성작품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답하였듯이, 예술은 오웰이나 헉슬리가 내다본 기술사회와 다른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기술지배의 전체주의 시스템을 역이용해, 인공위성을 통해 세계인들이 획일화된 가치를 벗어나 동시에 ‘창의적인’ 예술경험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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