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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무의미해진 시대, 예술 수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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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무의미해진 시대, 예술 수용은?
  • 유현주 미술평론가(미학박사)
  • 승인 2016.09.09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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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 사이 | 통섭의 기술을 얻는 방법

문학·미술 간 줄다리기 18세기에 정점
레싱 “문학 시간예술VS미술 공간예술”
문학에서 미술, 미술에서 문학 읽어야


예로부터 시나 소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는 경우는 왕왕 있어왔다. 실제로 그림과 문학은 서로 ‘경쟁하듯’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나 혹은 실제 역사적 사실을 모방하면서 각 장르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했었다. 때문에 고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회화는 말없는 시요, 시는 말없는 회화라고도 했으며, 고대 로마의 시인 호레이스도 “Ut Pictura Poiesis” 즉 ‘시는 그림과 같이’ 자연을 모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과 미술의 줄다리기는 계속되다가 18세기 독일의 문학평론가인 레싱과 당대의 미술평론가 빙켈만 사이의 논쟁으로까지 불거지게 된다. 그리스 시대 말기, 즉 헬레니즘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었던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의 비극적 죽음을 다룬 조각상인 <라오콘 군상>(하게산드로스를 포함한 세 명의 조각가 합작)에서 빙켈만은 다른 어떠한 장르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표현을 발견한다. 바로 그리스 신들의 저주로 뱀들의 공격을 받아 전신이 옥죄어져 죽어가는 라오콘과 아들들의 고통스런 모습의 조각상에 대해 빙켈만이 극찬을 한 것이다.


그 비평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체의 모든 근육과 힘줄은 고통스럽게 뒤틀려 있으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표현한 것과 같은 단말마의 비명이 아니라, 이들의 고통스런 모습은 오히려 육체의 고통과 위대한 영혼을 동일한 강도로 조각상 전체에 골고루 분배하고 있다.”


필시 대리석상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위대한 라오콘의 영혼을 본 것처럼 이 미술평론가는 전율하고 말았던 것이리라. 필자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이라는 빙켈만의 문구를 마치 헬레니즘 예술의 최고의 표현인 것처럼 가르쳤던 이유도 이와 같이 그리스 미술과 문화에 정통한 그의 탁월한 식견과 아울러 평론가로서의 차가운 분석 능력만큼이나 뜨거운 감성을 존중한 것임을 고백한다. 그런데 같은 시대 문학평론가인 레싱은 <라오콘>이라는 책 제목을 달고, 당대 최고의 심미안을 가진 이 미술평론가에게 감히 대어들 생각을 한 것일까? 그것도 문학과 미술, 서로 다른 장르인데 말이다.


문제의 단서는 바로 빙켈만이 지나가듯 쓴 것처럼 보이는, 같은 주제를 다룬 ‘시’에 대한 내용에 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 <아이네이아스>는, 빙켈만이 보기에 “소름끼치는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댔을 뿐, 조각상에서 드러낸 “격정 속 위대하고 침착한 영혼”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이는 문학평론가로서의 입장에서 보자면, 문학의 가치를 어딘가 폄하하는 것 같은 언술처럼 보일 수도 있다. 특정 작품의 예이긴 하지만, 이를 일반화시켜서, 레싱은 문학작품이 조형예술이 획득한 가치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인지의 물음을 확장시켜 간다. 즉 시인이 미술가의 조형적 표현을 모방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은 문학과 미술을 분리해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한마디로 우문(愚問)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예술가들에게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예술을 요리술이나 목수의 기술과 굳이 다르게 구분할 이유가 없었던 오랜 역사 속에서 이제는 예술 사이, 즉 장르사이의 엄격한 구분이 필요해진 시점이었던 것이다. 매우 진지하게 레싱은 결론을 내린다. 시, 즉 문학은 시간의 예술이고 조형예술, 즉 미술은 공간의 예술이다. 따라서 <라오콘 군상>은 단 한순간의 표현만 가능하기에, 절규나 단말마의 비명보다는 훨씬 절제된 감정의 표현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시인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함으로써 실로 라오콘의 비명이 별에 들리도록 질러대는 터프한 묘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예술영역의 구분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그러나 레싱의 구분이 오늘날 다시 모호해지는 것을 본다. 미술작품이 언어로 대체되기도 하고, 시가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것, 즉 구체시라는 것이 생겼다. 아폴리네르의 시 <비가 내리네>는 빗방울이 방울져 떨어지는 모양의 시이다. 미국의 팝아트 작가 키이스 아나트의 작품 <I am real artist>는 말 그대로 작가가 그 문구를 쓴 종이를 들고 서 있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일상의 전자 폐기물들을 모아 작품을 시작한 것이 발전된 것이다. 지난 2012년 카셀 도큐멘타 전시에 참가한 태국작가 핀트홍은 수면병을 일으키는 아프리카의 파리를 방사선으로 불임시키는 방법을 과학자들과 연구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또한 양자물리학자인 안톤 차일링거는 양자물리학을 작품 아이디어로 만들어 미술전시에 참가하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미술이고 문학이며, 과학이고 일상인가? 타 장르나 분야 간의 통섭과 융합을 주장하는 이 시대, 예술도 경계 허물기에 열중하는 중이다. 문학과 미술을 오가며 비교하던 레싱의 시대는 아니지만, 이제 다른 각도에서 문학과 미술을 함께 음미해보면 어떨까? 문학텍스트를 읽으면서 미술작품으로 해설하는 것, 혹은 미술작품 내부에서 문학이나 철학의 향기를 맡는 것, 이러한 것이 바로 이 시대정신에 다가가는 노하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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