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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포커스 | 헬스클럽의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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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포커스 | 헬스클럽의 파산
  • 송영웅(한국일보 미디어전략사업팀장)
  • 승인 2016.07.13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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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희망의 싹은 자라고 있었다

일자리 잃게 된 신입 직원, 회원 구제 등 최선

가지런한 개인소품, 소비자들 대처방식도 세련


신문사의 기자직은 흔히 ‘발로 뛰는 직업’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근무 연수가 늘어나고 시니어 기자가 되면 취재 현장에서 퇴역해(?) 사무실에서 취재 지시나 기사 수정, 지면 및 편집 방향을 정하는 데스크 역할을 맡게 된다. 언론사의 데스크는 아침부터 밤늦도록 그날의 기사와 취재 방향을 정하고, 기자가 쓴 기사를 수정·보완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자리를 뜰 수 없다. 말 그대로 ‘앉은뱅이’ 신세로 전락한다. 필자도 이런 데스크를 오랜 기간 맡으면서 허리와 목 디스크 증세에 시달렸고, 스트레칭이라도 할 요량으로 회사 인근의 소규모 헬스장에 등록해 수년째 다니고 있다.


그런데 지난 주 목요일 오후 헬스장을 갔는데, 문 입구에 ‘사정상 더 이상 영업을 할 수 없어 폐쇄하니 개인 사물은 모레까지 찾아가라’는 안내장이 붙어 있었다. 사무실에 올라가 보니 회원 20여명이 모여 불안한 표정으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사무직원 2명은 화난 회원들의 환불 요청과 밀려드는 문의전화에 당황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직원이 전하는 헬스장 폐쇄의 내막은 이랬다. 이곳은 문을 연지 6년여가 됐다. 그간 수차례 건물 임대료를 제 때에 내지 못해 건물주로부터 경고를 받았는데, 최근 들어 영업이 더욱 악화돼 또 임대료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헬스장 주인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밀린 임대료를 마련해 건물주에게 내려고 했는데, 이미 건물주가 "더 이상 임대를 줄 수가 없으니 나가라"고 최종 통보를 해왔다는 것이다. 주위에선 건물주가 임대료를 자주 밀리는 헬스장을 쫓아내고 인근에 있는 대기업의 계열사를 대신 입주시키기로 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흘러나왔다.


필자가 개인 이야기를 장황하게 기술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런 혼란 상황에서도 작지만 희망의 빛을 봤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헬스장 주인이 연락을 끊고 사라진 그날, 화난 회원들을 응대한 사람은 두 명의 남녀 사무직원들이었다. 그중 한 직원은 이달 3일부터 출근한 신입이었다. 그 직원은 입사 4일 만에 회사의 파산 절차를 떠맡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불안해하는 회원들에게 성심성의껏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이들은 가입이 얼마 안 된 회원에게는 카드 결제 취소 절차를 해주는 등 자기들의 선에서 구제해 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두 젊은이를 보면서 ‘모든 책임을 져야할 주인이 사라진 상황에서 저 두 젊은이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두 젊은이가 직업을 잃은 것에 비하면 나는 회비 몇 푼을 날린 것에 불과한데, 다 잊어버리자’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열하고 비정한 사회에서도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젊은이들이 곳곳에 있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또 다른 놀라움은 국내 소비자들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사고가 나고 다음날 개인 소지품을 찾으려고 헬스장을 찾았는데 메모장이 붙어 있었다. 피해를 본 회원들이 상의를 해서 포털사이트에 피해자 카페를 만들어 놓았으니 그리로 들어와 함께 자구책을 마련하자는 내용이었다. 카페에는 이미 상당부분 법적인 검토가 돼 있었고,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대처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견들이 주류를 이뤘다.


개인 사물을 찾아 가려고 헬스장에 갔는데 개인 물품이 비닐에 가지런히 담겨져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 개인 물품 도난 사고가 발생하거나, 헬스장의 집기들이 파손·분실되는 경우가 다반사일 텐데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이 헬스장이 파산한 곳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앞으로 피해 구제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지만 ‘우리 소비자들의 수준이 참 많이 높아지고 성숙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글을 쓰는 도중 휴대폰을 통해 헬스장 주인이라는 사람의 문자가 왔다. ‘건물주의 갑작스런 퇴거 조치로 헬스장을 폐쇄했지만 회원들의 회비 반납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회원 수가 800명에 육박하는 점을 감안하면 반환을 하겠다는 주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하지만 주인의 말처럼 어느 정도라도 환불이 이뤄진다면, 이번 일로 금전적 피해는 있겠지만 얻는 것도 상당히 있을 것 같다. 젊은 직원들의 성실한 자세, 소비자들의 현명하고 합리적인 대처, 여기에 주인의 책임의식까지 확인된다면, 다소의 손해와 불편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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