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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년, 세종시 건설은 예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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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년, 세종시 건설은 예언됐다?
  •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 대표)
  • 승인 2013.04.15 1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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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와 인연 깊은 부안임씨

독락정은 세종시의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옛 연기군 남면 나성리 금강변에 1430년 처음 건립된 독락정은 연기군 시절 ‘향토유적 제42호’로 지정되었고, 1988년 삼문 및 사당이 완공되어 전서공(典書公) 임난수의 충효정신을 기리고 있다. 지난 2007년부터는 이곳에서 임난수의 충효정신을 기리는 ‘독락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독락정은 임난수 장군의 둘째 아들 임목(林穆,1371~1448)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목은 이 정자에 대한 기문을 아들 뻘인 남수문에게 부탁했고, 남수문은 존경하는 임목을 위해 ‘독락정기(獨樂亭記)’를 지었다. 독락정의 건립 배경과 경관 및 그 의의에 대해 쓴 기문(記文) 형식의 이 글은 목판에 새겨져 현재에도 ‘독락정’에 걸려 있다.

남수문은 고성남씨로 1408년(태종 8)에 태어나 1426년(세종 8)에는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교리가 되었고, ‘고려사절요’의 집필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풍류를 즐기는 생활을 하다가 3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독락정은 1984년 12월 29일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독락정의 독락(獨樂)은 사마광(司馬光)의 독락원기(獨樂園記)에서 따왔다고 독락정기 내용에 기록돼 있다.

독락정에서 세종시를 돌아보다

독락정기는 글의 성격에 따라 기승전결(起承轉結)로서 빈틈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글을 짓게 된 경위(기), 독락정의 위치와 경관 및 정자 건립(승), 명리를 초탈하여 자연을 즐기며 배우는 독락의 어려움과 그 철학적 의의(전), 본인이 따를 수 없는 임목의 높은 뜻과 독락정이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결) 등으로 구분된다.

독락정기 기문 내용은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임목과의 관계 및 기문 청탁의 정황을 설명하고, ② 독락정 주변의 강과 산, 들과 길 등 경관을 묘사하며, ③ 임목이 경관을 감상할 독락정을 세우고, ④ 기문 쓰기를 승락하고 요산요수와 인격 수양은 동체임을 강조하며, ⑤ 임목의 자연 심취에 존경과 찬탄을 보내고, ⑥ 실천할 수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임목의 독락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특히 둘째 부분에서는 실감나는 사실적 표현으로 빼어난 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 독락정기(獨樂亭記)-고성남씨 직제학 남수문이 쓴 독락정기(記)

"강의 질펀한 모래밭 넓게 흐르는 물/ 하늘과 물이 한 빛인데/ 바람 불면 푸른 주름살이오/ 달 비치면 은물결이라(江之平沙漫流 天水一色 風而綠皺 月而銀波)."

남수문은 유가적 자연관과 수양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독락정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뛰어남을 예찬하는 중에 "북으로 원수산(元帥山)이 성곽(城廓)처럼 둘러 있고, 남으로 계룡산이 반공에 솟아나고 그 동·서쪽 여러 산이 혹은 조회하는 듯하고, 혹은 읍하는 듯하여 기괴함을 팔고 특이함을 안은 것이 한 가지만이 아니다"라는 구절은 주목할 만하다.

주위의 여러 산이 이곳을 향해 읍을 한다는 표현은 여기에 행정복합도시가 건설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락정기는 자기가 모시던 상관의 정중한 부탁과 나이 어린 옛 부하에게 예를 갖추어 글을 청하는 선비의 정신이 요즘 세태에 비추어 본받을 만한 인간관계의 전범으로 볼 수 있다. 자연을 개발논리의 관점으로만 보는 현재의 개발지상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자연관이 엿보인다.

세상의 사람들이 욕심과 명예에 집착하여 눈앞의 자연이 주는 위대한 교훈을 잊고 세속에 파묻혀 사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자연을 수양의 스승으로 삼아, 자연은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관계임을 또 다시 성찰하게 한다.

독락정기 쓴 남수문은 누구?

기문을 쓴 남수문<南秀文, 1408(태종 8년)~1442년(세종 24년), 자는 경질(景質), 후에 경소(景素)로 고쳤으며, 호는 경재(敬齋)>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다. 병조판서를 지낸 남금이 그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그의 용모는 선인(仙人)에 비할 만하고 기상은 추응(秋鷹)에 비할 만하고 효행과 호학(好學)은 안회(顔回)와 증삼(曾參)에 비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세종 때인 1426년 사마시(司馬試)와 정시(庭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1435년 중시(重試)에서는 수석으로 합격했다.
관직은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세종의 배려로 최초로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했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성리서(性理書)에 근본하고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해 학문으로는 당대의 독보적인 인물로 꼽혔다. 신석조(辛碩祖), 권채(權採), 유의손(柳義孫)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에 뽑혀 이름을 나란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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