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있지 나눌 이야기 없는 술 문화
빨리 취하려고 폭탄주 제조법만 발달
가슴 설레는 내 삶이야기 밤새 나누는
그런 술자리가 행복하지 아니 하겠나
20년 간 자신이 만든 ‘글 감옥’에서 한국 최고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써낸 작가 조정래의 한 권짜리 장편소설 <허수아비 춤>에 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 옛날부터 우리 어른들이 술에 대해 두 가지를 가르치기를,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라 하였고, 술은 섞어 마시지 마라 했다. 왜 그랬을까. 세 살 버릇 여든 가더라도 처음에 술버릇을 잘못 들여 술망나니 되는 것을 막으려 함이었고, 도수가 다른 술을 섞어 마시게 되면 몸을 쉬 상하게 되기 때문이었다."(p.217)
그런데 우리의 음주문화는 섞어 마시는 소위 ‘폭탄주’ 문화다. 왜 우리는 폭탄주에 열광하는 걸까? 빨리 취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빨리 취하려고 하는 걸까? 서로 할 이야기가 없어서다. 술은 서로 이야기하려고 마시는 것이다. 아폴론의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디오니소스의 알코올 힘을 빌려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술꾼들은 술만 있지 서로 나눌 이야기가 없다. 소위 이야기 할 내용, 즉 콘텐츠가 없다. 그래서 빨리 취하기 위해 폭탄주를 마시는 음주문화가 우리네 문화다. 서로 나눌 이야기가 없어 멀뚱멀뚱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 그 황당한 상황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폭탄주를 마시는 것 아닐까?
인간은 이야기하려고 산다. 게다가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누구에게나,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자기 나름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이 삶의 엄연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게다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소연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실제 심리 상담의 관건은 상담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잘 들어주는 데 있다. 상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훌륭한 상담 기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 실제로 생각을 ‘내적언어’(러시아 심리학자 비고츠키)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다. 그래서 생각은 "내가 나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혼자 중얼거리는 현상은 이 내적언어가 은연중에 튀어나오는 것이다. 힘들면, 생각이 복잡하면, 외로우면 사람들은 중얼거린다. 왜?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만약 자신의 이야기가 없으면, 자신의 삶에 의미부여가 안 된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술 마시며 할 수 있어야 한다. 가슴 설레는 내 삶의 이야기를 밤새 나눌 수 있어야 진짜 내 삶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마신다. "저 197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의 고급 관료 두 사람이 뉴욕의 어느 술집에서 양주를 병째로 시켜놓고 서양식으로 핥는 것이 아니라 한국식으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 그런데 독한 양주를 냉수 마시듯 벌컥벌컥 마셔대는 그들의 모습은 다른 손님들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자기네가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의 술 마시기는 한 병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병째를 시켜 그들은 더욱 신나게 벌컥벌컥 마셨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누군가가 내뱉었다. 갓뎀 크레이지!(미친놈들!) 그 욕설은 홀 안의 다른 술꾼들 사이로 금방 퍼졌고, 술을 많이 팔아먹어서 좋은 술집 주인마저도 쓴 웃음을 물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같은 책, pp.218-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