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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넘치는 아티스트 Freddie Merc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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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넘치는 아티스트 Freddie Mercury
  • 성현기 팝칼럼니스트
  • 승인 2012.11.20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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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eddie Mercury
Freddie Mercury는 1991년 11월 24일
당시 45세의 나이로 에이즈에 감염돼 사망했다. 그가 사망 직전까지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겨온 것은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죽기 전까지 노래를 하고 싶은 열정 때문이라고 한다. 8옥타브를 넘나드는 목소리를 지닌 Freddie Mercury는 자신의 재능을 정확히 인지, 연마하여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에너지 넘치는 아티스트였다

그룹Queen을 이끌고 20년 이상 각광을 받으며 2억장이 넘는 음반판매를 기록한 Freddie Mercury는 1946년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에서 탄자니아를 통치하는 영국 공무원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이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였다고 하는데 이름과 그의 외모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인 백인이 아니었다. 그의 조상은 8세기경에 이슬람교도에 밀려 인도로 피신한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Parsi)계통이다.

▲ 스위스에 세워진 Freddy Mercury동상
유년시절을 인도의 봄베이 사립학교에서 보낸 Freddie Mercury는 기숙사생활을 하며 Hectics라는 밴드해서 활동했는데 처음에는 리드보컬을 맡지않고 키보드를 연주했다고 한다. 이 때 부터 Freddie Mercury 라는 이름을 애칭으로 사용하였고 영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취미생활로 밴드활동을 하며 학업에 전념하였지만 음악으로 향하는 열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1970년 대학 학보에 밴드멤버 모집광고를 냈다고 한다.
그의 모집광고를 접한 Brian May(기타) 와 Roger Taylor(드럼)는 자신들이 활동하던 밴드 Smile를 해체하고 Freddie Mercury와 의기투합하여 만든 밴드가 바로 Queen이다. 이후(1971년) 베이스주자 John Deacon이 합류하면서 1973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당시에 모든 신인 밴드가 그랬듯이 데뷔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당시 영국의 팝 시장은 위대한 그룹 Beatles의 여운도 남아 있는데다 Led Zeppelin, Deep Purple, Pink Floyd 등 슈퍼밴드들로 넘쳐났기 때문에 신인밴드는 살아남는 것이 목표이자 성공이란 평가를 받던 시기였다. 더구나 Queen의 음악은 Led Zeppelin과 Deep Purple로 양분된 정통 록과 Pink Floyd가 주도했던 프로그레시브 록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에 보편화 되지 않은 그램 록 계열의 음악을 구사하며 과장된 분장으로 무대에 선다는 것이 시대적으로도 애매한 포지션 일수밖에 없었다.

멤버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포지션에 충실하며 음악을 하는 것이 팀 구성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데뷔음반에 참여했던 Freddie Mercury는 이때부터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밴드를 이끌게 된다. 그가 주도해서 만든 2집 QueenⅡ(1974년)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호응을 얻으며 슈퍼밴드의 틈바구니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 후로 Freddie Mercury는 밴드의 음악을 주도하고 팀의 리더로서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가 만든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Love of My Life,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Don't Stop Me Now 등은 음악성과 상업성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며 팀을 월드밴드로 도약시킨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 두 가지 축복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슈퍼밴드의 틈바구니에서 시작하여 팀을 월드밴드로 성장시켰지만 1991년 앨범 Made In Heaven을 준비하던 중에 폐렴이 악화되어 11월 24일 런던에서 에이즈로 인한 기관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하루 전에 그는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세상에 고백했다.

▲ Freddie Mercury는 야성적인 스테이지 매너를 자주 연출했다.
타고난 재능이 많았지만 그가 가진 재능이 결코 초 일류급은 아니었다. 팝 필드에는 그만한 재능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넘쳐나는 슈퍼밴드 사이에서 자신의 재능을 정확히 인지하고 감동이 담긴 예술로 표현하고자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Freddie Mercury를 포함한 Queen의 멤버 면면을 Led Zeppelin이나 Deep Purple, Pink Floyd 같은 동시대 슈퍼밴드의 멤버와 비교하면 격차가 크다.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하는 Pink Floyd의 전위성을 감안하여 두 슈퍼밴드멤버만 살펴봐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기타에 관한한 비교를 허용하지 않는 독보적인 기타리스트 Jimmy Page(Led Zeppelin)와 Ritchie Blackmore(Deep Purple)를 비롯하여 금세기를 대표하는 키보드 주자John Lord(Deep Purple), 드러머 John Bonham(Led Zeppelin)의 무게감은 Queen의 멤버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보컬 부분에서도 Freddie Mercury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Robert Plant(Led Zeppelin)나 Ian Gillan(Deep Purple)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가 택한 방법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며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의 장점을 극대화 시켜나가는 것이었다.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구성에 가까운 편성과 180회 이상 오버더빙으로 Bohemian Rhapsody를 만들었고 1984년에는 당시 록 밴드에게는 금기사항에 가까운 신디사이저를 과감히 도입하여 Radio Ga Ga를 발표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행위예술가인 Lady GaGa 역시 자신의 이름이 이곡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필자는 이렇듯이 자신의 재능을 용기있게 표현한 Freddie Mercury의 음악적 에너지는 죽음 앞에서도 식지 않았던 음악에 대한 열정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죽음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Freddie Mercury의 열정이 담긴 음악으로 스산하고 쌀쌀한 초겨울을 뜨끈함으로 채우고 싶다.

Queen의 음악에 익숙한 분들은 1991년 Innuendo앨범 발매 이후에 녹음한 곡들, 그가 사망하기 2주 전까지 녹음했던 곡 Mother Love와 그의 솔로곡들을 멤버들의 편곡으로 완성시켜 담은 유작 앨범 Made In Heaven을 들으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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