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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의 미학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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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의 미학②
  • 김용수 작가
  • 승인 2012.10.25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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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혹평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나, 그간 제가 배운 기존의 역사서
수만 권을 쌓아 놓아도, ‘한단고기’ 한 책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민족 시원始原의 유원幽遠함’, ‘시공간의 무한한 확장’, ‘철학의 깊이’, ‘창조적 자극’, ‘인류애’, ‘교훈’, ‘자기수양’...... 가늠 할 수 없는 세계가 펼쳐있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기로 하자면, 지금도 배우는 일제 잔재가 배든 역사서가 더 비중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설혹, 왜곡됐다 하더라도 - 읽을수록 좌절감에 빠지는 ‘왜 사관’보다 - 선조들이 충정이 더 낳습니다. 거기에는 세포 속 유전자를 흔드는 무엇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중국이나 일본의 예에서 보듯이, 없는 역사도 만들어 자국민을 교육하고, 남 나라 역사도 자기역사로 윤색하고 편입하고 있는, 살벌한 세상을 살고 있는 데.
이 땅은 세계화에 편승해 역사 과목을 없애자 하고, 또 학계는 식민사관에서 한 발도 움직임이 없으니. 옛 장쾌한 겨레의 호연지기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입니다.

국제화의 파고가 높을수록 ‘정체성’에 관한 자문自問은 놓칠 수 없습니다. 그 표본은 바로 ‘바른 역사관’ 입니다. 정체성은 개인이나, 국가나 삶의 이정표와 같습니다. 버스를 타도 이정표요, 여행을 떠나도 지도를 봅니다. 만약, 그 지도가 왜곡되어 있다면, 목적지를 찾을 수 없듯이. 겨레의 참정신이 깃든 지도를 모르는 것이야 말로,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는 밖을 향하여 너무 멀리 왔습니다. 그 사이 우리 ‘안’은 황폐하여 갈 길을 잊었습니다. 방황의 고리를 끊는 길은 ‘자각自覺’에 있습니다. 돌아보는 것은 ‘순간’ 이나, 그 순간이 겨레의 미래를 열수 있습니다.

‘한단고기’가 위서가 아님은, 한국천문연구원 박 석재 전 원장과 한국고등과학원 박 창범 교수의 ‘오성취루五星翠樓’기록을 확인한 과정에서 이미 증명했습니다. 13세 단군 흘달 재위 기간인, BC1733년(무진 50년) 다섯 행성이 28수 별자리 중, 루라는 별자리 주변에 - 위부터, 화성-수성-달-토성-목성-금성 순으로 나란히 나타난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박석재 홈페이지 참조) 현대과학 방법으로, 그 것도 전공 학자들이 증명한 바, 이 사실하나만으로도, ‘한단고기’의 연구 가치는 입증된 것입니다. ‘한민족 참 역사’ 복원의 서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단재 신채호의 절규입니다. 중화사상의 원조 사마천의 ‘사기(BC109-91)’의 예를 봐도, 역사서는 그 나라 편찬자의 관점과 철학이 필연적으로 가미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작금에 학계의 맹점은 철학의 부재에 있습니다. 남이 쓴 역사를 걷어내지 못하고, 서양의 방법론에 가려, 만들어진 풍경입니다. 그간 역사서가 건조한 지식 찌꺼기와 같았던 이유이자, 자기역사를 스스로 정립하지 못한 비애입니다. 그간 배운 역사를 돌이켜보면 - 민족의 원대한 사상은 상상도 못하였으며, 그마져도 ‘원인과 결과를 도출하고,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어, 겨레를 생각해 볼 것인가?’도 빠졌던 것입니다.

제국이 판을 짠 역사가. 그 민족에게 혼을 넣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요, 식민사관 은 민족 얼을 해체하려는 불순한 의도였던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함에도 개선되지 않는 것은, 오염된 사고思考의 질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정보의 한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배워 알고 있는 것을 고수 하려는 속성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여부는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 저간의 사정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찌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 선조들의 체험과 혈흔이, 내 유전자에 켜켜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 천 년, 아니 수 만년은 바로 눈앞의 현실입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은 선조들이 걷던 땅이요, 내가 체온으로 느끼는 바위는 선조들이 만지던 바위입니다. 박물관의 유물만 역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강토가 선조들의 혼과 땀과 눈물이 배인, 산 증거의 장입니다. 우리가 선조들을 기려 야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삶은 이론이 될 수 없고, 논리로 풀 수 없습니다. 역사는 생물 같아서, 논리로 접근할 수 없는 변수가, 수 없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실체를 찾아 참 역사를 복원하고자하는 열망과 창조정신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일제 36년 폭압보다 무서운 현실입니다. 어떠면, 제국의 의도가 이 것 이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진실한 역사 복원을 포기할 수 록, 주변나라는 더욱더 맹렬히 왜곡을 강행할 것입니다. 그들을 탓할 명분을, 우리 스스로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간, 과도한 폭력 세력들이 민족정신을 훼손코자 광분을 했지만, 불씨가 살아 있는 것은, ‘한단고기’ 편찬자와 같은 선조들의 애끓는 혼이, 겨레를 붙들고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야말로 애국가의 가사처럼 하느님의 보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한단고기!’ 그것도 딱 한 권이 살아남은 과정을 봐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중국 24사史는 수 천 권이 넘습니다. 앞으로 ‘한단고기’ 이 한 권 책은 왜 사관과, 중국 24사 속 모든 삿됨을 끊어 없애는 금강석이 될지 모릅니다.

몇 분의 역사학자들이 겨레 혼을 되살리고자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참 눈물겨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역사를 돌이키면, 깨인 혼을 지녔던 분들은 항상 뒷전으로 밀리고, 그 자리를 무도한 사람들이 채워 왔습니다. 국민이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겨레 성원들이 자각하여 서로 힘을 보태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불결한 생각들이 겨레역사에 끼어들 수 없도록,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 역사책을 다시 쓰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고구려 900년 역사(고기에 의함)가 막을 내릴 때. 당나라 장수 이(세)적이, 고구려 장서각을 넉 달간 불태웠다 했으니. 오오, 통재라! 고구려는 부여를 잇고, 부여는 고조선을 잇고, 고조선은 환웅 시대를 이었을 것이니...... 그 화염 속에 사라진 고조선 역사, 6천년 겨레의 혼은 어디로 갔습니까? 신라는 당을 불러들여 화를 자초했고. 조선은 주자에 취하여 미몽을 헤매다, 사악한 일본에 뿌리를 내줬습니다. 현재는 중화의 깃발을 다시 치켜든 중국이, 한민족 역사를 통째로 삼키는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건만. 우린 아직도, 남북 대결을 풀지 못하고 있는 지금. ‘한단고기’는 바로, 겨레의 희망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환웅천황께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면서(고기에 의함), 겨레에게 ‘울’사상의 나무를 심은 후, 온갖 풍상도 꿋꿋이 버텨. ‘우리’라는 말 속에, 하늘의 큰 뜻과 세계를 아우르는 큰 품을, 겨레의 가슴 마다 살려 놓았으니. 지금껏 어느 민족도 할 수 없었던, ‘홍익인간’의 실체를 온 정성으로 구현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연구를 거듭하여, 참은 빛내고, 삿된 것은 버리며, 미진한 것은 더 진전시켜, 참된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 원대한 일만 있는 것입니다. 만약 진실을 눈앞에 두고도, 그 실체를 다시 눈 감는다면, 우리 선조들의 영령은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며, 어디서 왔습니까?

* 주: 고어에 "하늘을 桓이라 한다.(天曰桓)" 는 견해를 취하여,
역사학자 임 승국 선생은 - ‘환桓’을 ‘한’으로 읽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논지에 따라 ‘환단고기’- ‘환’을 ‘한’으로 했음을 밝힙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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