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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실한 종자씨앗 갈무리 할 때 상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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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실한 종자씨앗 갈무리 할 때 상강
  • 정규호 전통장류명품화사업단 사무국장
  • 승인 2012.10.2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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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산천에 울긋불긋 단풍은 절정에 이르고, 황금들녘은 마지막 추수가 한창이다. 아침 저녘으로 선선한 기온을 넘어 제법 쌀쌀한 기온이 감돈다. 가을의 끝자락에 다 다른듯 이른 감은 있지만 비로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니 한 해 갈무리를 하면서 서서히 겨울채비를 해야 할 듯하다.

상강은 음력 9월에 드는 가을의 마지막 절기로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24절기중 18번째 절기로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에 든다. 이 때 태양의 황경은 210도에 이를 때이며 양력으로는 10월 23일 무렵이다. 이 시기는 일교차가 심해 낮에는 가을의 청명한 날씨가 지속되지만 밤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져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는데 온도가 더 낮아지면 살얼음이 얼기도 한다.

옛 사람들은 상강부터 입동 사이를 5일씩 삼후(三候)로 나누어 계절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데, 초후(初候)는 승냥이가 산짐승을 잡는 때이고, 중후(中候)는 초목이 누렇게 떨어지며, 말후(末候)는 겨울잠을 자는 벌레들이 모두 땅속에 들어가는 때라고 했다. 아울러 농가월령가 9월령에는 "들에는 조, 피 더미, 집 근처 콩, 팥가리, 벼 타작 마침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권문해(權文海)의 『초간선생문집(草澗先生文集)』에는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 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산 모양이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 처음 놀란 기러기가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도리어 근심이 되는 것은 노포(老圃)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향해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 라고 상강에 대한 시를 읊조리고 있다. 바로 농가에서는 된서리가 내리기 전에 마지막 추수를 서둘러서 해야 할 때이고 양반들은 국화전에 국화주를 마시며 만추를 즐기며,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러한 상강은 단풍이 절정에 이르러 국화도 활짝 피어 국화주를 마시며 가을 나들하기에 좋은 시기이지만 농촌에서는 막바지 가을걷이로 매우 분주해지는 시기이다. 벼를 비롯하여 온갖 곡식과 채소를 수확하여 탈곡하며, 햇볕에 말려 뒤주나 곡간에 갈무리를 해야 한다. 또한 수확한 곡식 중에 잘 익은 것들은 종자씨앗으로 보관을 해야 하는데 종자씨앗을 보관하던 뒤웅박에 넣어 추녀 끝에 달아 두거나, 열매자체를 잘 묶어 통풍이 잘 되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걸어 두었다. 또한 이 시기는 가을 파종을 해야 하는 봄 수확작물인 보리나 밀, 마늘 등을 심어야 하는 시기로, 벼를 벤 논에는 추수하고 남은 볏짚을 태워 밑거름으로 삼고, 가을갈이를 하여 파종을 한다. 이 무렵 가을 추수가 끝나기 무섭게 보리파종을 하는 것은 보리파종이 늦어지면 동해(凍害)를 입을 우려도 있고 수확량도 급감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리파종이 늦어지면 이듬해 보리 숙기가 늦어져 보리 베기가 지연되고 또 다시 모내기가 늦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이 시기를 놓칠까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였다.

추수와 갈무리를 하고, 보리 파종이 끝나면 서서히 월동채비를 하였다. 무를 수확하고 남은 무청을 비롯하여, 무, 호박 등을 말려서 보관하거나, 고구마순을 비롯한 가지, 고춧잎, 깻잎 등을 채취하여 말리거나 장아찌를 담거나 하였다. 가을철 풍성한 야채를 말리거나, 장아찌를 담거나 하는 것은 겨울철 부족한 비타민과 무기질을 섭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이면서도 지혜로운 식품저장법이였다. 또한 이 때부터 겨울철 보온단열을 위해 가옥을 수선하거나, 특히 초가지붕갈이를 위해 추수한 새 볏짚으로 이엉엮기와 용구새틀기 등을 하였다. 수목의 월동준비도 이 때에 이뤄졌는데, 해충들이 동면에 들기 전에 이뤄져야 했다.
한편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행하던 상강풍속으로 ‘둑제(纛祭)’를 지내던 풍속이 있었다. 둑제는 조선시대 군대를 출동시킬 때 군령권(軍令權)을 상징하는 깃발인 둑[纛]에 지내는 국가 제사로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에 지냈다고 하는데 병조판서가 주관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둑제는 국가의 군사권을 상징하는 제사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였는데 조선시대 태조 2년(1393)에 홍색(紅色)과 흑색(黑色) 2기의 둑[纛]이 완성되자 영안군(永安君)으로 하여금 둑신[纛神]에게 제사를 드리게 했다는 기록에서 둑제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세종 12년(1430)에는 명나라의『홍무예제(洪武禮制)』에 따라 제단, 제사 시기, 폐백, 복색, 헌례(獻禮), 기독(旗纛)의 노출 여부 같은 둑제의 제반 사항이 모색되었고, 이를 기초로 세종 22년(1440) 둑제의 의주가 제정되었다고 한다.

제사의 과정은 크게 제사 전의 준비 절차, 행례 절차, 예필(禮畢) 및 납신(納神)의례가 행해진다. 먼저 준비 절차는 시일(時日), 재계(齋戒), 진설(陳設) 등이고 행례는 폐백을 드리는 전폐(奠幣)와 초헌, 아헌, 종헌 등 일반 제례와 같은 절차이다. 예필은 제사의 종결을 알리는 의례이며, 납신은 제사 후 신위를 봉안하는 의례이다.
이러한 둑제는 군사(軍事)가 국가를 실제로 유지하는 중요한 토대로 그 상징성이 제사와 결합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건국 이후 문치(文治)가 강조되었고, 유교 의례가 반영되어 무(武)적인 요소가 약화되었지만 무(武)의 상징성은 국가가 유지되는 한 버릴 수 없는 것으로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었다. 둑제는 무관이 주체가 되는 유일한 국가제사로서 지금은 생소한 풍속이나, 전통무예를 계승하는 단체를 비롯하여 일부 지자체에서 이순신을 비롯하여 지역의 명장의 전승을 기리기 위해 전통무예축제를 시행하면서 ‘둑제’를 복원하여 시행하면서 전승의 맥을 잇고 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겨울로 가는 환절기인 상강은 농가에서는 가을을 갈무리하고 겨울을 준비하며, 내년 농사를 위해 건실한 종자를 보관하던 중요한 절기이다. 아울러 수려한 단풍과 단아한 국화 향 등 자연이 주는 여유를 만끽하며 즐기는 시기이기도 하다. 국가에서는 겨울철을 앞두고 군사의 기강을 세우고 굳건한 외세방어를 위한 상징적의미로 둑제를 지내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거두는 것이 끝이 아니라 가장 먼저 건실한 것을 미래를 위해 소중히 갈무리 하는 우리 선조들의 전통가치관은 무분별한 소비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현대 생활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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