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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서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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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서 피는 꽃
  • 김용수(작가)
  • 승인 2012.09.05 17: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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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내가 배운 것들에 대한 회의가 왔다. 서양 시스템으로 짜인 교육, 길들여지는 정서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오천년 역사를 가졌다는 민족이, 삼백년 역사에 눌려있는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 선조들은 과연 바보였는가? 내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가? 수많은 상념이 찰나에 일어난 것이다. 극에 달하면 반전이 있는 법(물극필반物極必反). 그리고 회귀.
내 고향 충청도 계룡산! 수많은 전설이 어린 그 곳에 나는 짐을 풀었다. 정체성을 해결하지 않고는, 허상의 인생을 살 것 같은 절박감이 있었다. 실패해도 좋았다. 적지 않은 세월이 갔으나 나는 아직도 길속에 있다. 여기 글들은 그에 대한 기록이다.

태초! 한 소리에 우주가 탄생합니다. 그야말로 찰나입니다. 찰나가 영원을 낳는 순간입니다. 찰나는 종시終始가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는 곳에서 시공時空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물리학에서 빅뱅Bick Bang(대폭발)이라 했습니다.

소우주는 대우주의 질서를 한 치의 오차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깨달음도 찰나요, 작품도 찰나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낳는 것은 찰나지만, 그 찰나를 위하여 광대한 침묵이 있습니다. 작가의 일상은 사색과 침묵의 시간입니다. 침묵은 침묵으로 끝나지 않고, 소리를 동반합니다. 그 소리는 내면을 울리고, 마음에 꽃을 피웁니다. 그 꽃이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조각이 되고, 음악이 됩니다. 침묵이 곧 정화精華가 되는 것입니다.

침묵은 영혼의 거름 막 같아서, 여기를 거친 정신은 맑고 투명합니다. 침묵이 깊을 수 록, 자기 자신을 더 가까이에서 마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날 때, 오히려 내면의 반전이 있습니다. 안을 따라 살피는 것을 관觀이라 합니다. 사특함을 떨어내고, 투명한 본성을 보고자하는 수행 방편입니다.

진선미眞善美가 나뉠 수 없는 것처럼. 안과 밖이 순일 할 때, 작품은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작품은 작가가 행동에 옮기기 전에 이미 결말이 납니다. 작품 제작은 침묵 속에서 보고, 듣고, 만진 것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 불과 합니다. 작품은 곧 작가의 분신이자 동시에 거울인 것입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침묵의 조건은 아닙니다. 침묵은 사자 같은 포효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베토벤 ‘운명 교향곡’처럼, 오선지에 그린 음표가 - 오케스트라의 선율로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것같이, 모든 작품은 ‘천둥을 품은 침묵의 표상’입니다.

작품 감상할 때 이 침묵의 시간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그 작품과 작가의 말을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건 작품은 그 자체가, 침묵의 웅변입니다. 침묵이 깃든 말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평화와 용기를 주지만. 사색이 결여된 말은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도 심금을 울릴 수 없습니다.

노자는 말 합니다. "학문學文은 나날이 보태고, 도道는 나날이 더는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 살다보면 어느 때는 붙들고, 어느 때는 놔야 합니다. 젊은 시절은 호기심과 야망이 충일하지만, 나이든 욕망은 화를 부릅니다. 지혜가 결여 된 야망, 행동 없는 지식. 인생의 그늘은 늘 부조화에서 옵니다. 모두 우주 질서에 어긋나 생기는 일입니다.

아름다움이 조화에 있다는 것은 천지 이치에 합일한다는 말입니다. 새 잎 나고, 꽃이 피고, 새 우는 일상이 또한 그러합니다. 세상 어느 것도 조화와 균형을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작품을 한다는 것은 조화와 균형을 찾는 끝없는 여행입니다. 작은 돌 하나, 작은 화지畵紙를 앞에 놓고 작가들이 늘 시름하는 이유입니다. 이 일은 우주의 일이니, 사람이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최선의 길만 있습니다.

최선이 참되다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와 합치하려는 정성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창작의 순간에는 사물과 이분되는 심리적 거리가 매우 좁아집니다. 나뉨 없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상태는 천지 본성과 합일하는 계기를 만듭니다. 세상에 완벽한 존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존재란 생명이 있어야 하고, 거량據量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우주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우주도 고정되어 있지 않거늘. 완벽 자체를 갈망하는 것은, 오만이자 이론 속의 일입니다. 실체 없는 이론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늘 꿈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은, 눈앞의 실상을 실상으로 보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스토아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낮에도 등불을 밝히고 다닌 고사는 잘 알려진 얘깁니다.

가까운 내 몸부터도. 차면 비우고, 비면 채우려합니다. 우리 몸의 생리가 그러하다는 것은, 우주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이야말로 창작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조각에도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안에서 밖으로 보태는 것(소塑)이고. 그 둘은 밖에서 안으로 덜어가는 방법(조彫)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방편일 뿐 창작의 근본은 더는 일에 있습니다. 작품 할 때 자르기도 하고 보태기에 바쁘지만, 작가의 내면은 태풍의 중심처럼 평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작품 전체를 조율할 수 있고,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의 더께는 기혈의 흐름을 막을뿐더러, 마음의 눈을 가리고 손길을 무디게 합니다. 창작은 순간순간, 촌철의 빛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늘 깨어있지 않고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볼 수 없습니다. 작가는 어둠속에서 빛을 보고, 빛 속에서 어둠을 감지합니다. 빛과 그늘이 겹쳐있듯이 하나를 버리고 어느 하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빛 속에 너무 오래 노출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음지 속의 일도 같습니다.

아름다운 색만 칠하고, 아름다운 형태만 가득 채운다 해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움만을 쫒을 때 추하게 되고, 추하다 해서 다 추한 것 또한 아닌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추함을 등대 있고, 추함 역시 아름다움을 포태하고 있습니다. 작품이 인생을 담는다는 단초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상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번뇌는 항상 번뇌가 아닙니다. 고통은 일순에 기쁨이 되고, 기쁨 또한 순간에 슬픔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통도, 기쁨도 다 실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조각은 물질을 직접 다루는 일이라,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하고 에너지 소비 또한 많습니다. 세상은 번다합니다. 조각 일도 번다합니다. 세상이 번다하다 해서 등질 수 없는 것처럼, 조각도 복잡한 과정을 거를 수 없습니다. 일상이 수도修道의 장이요, 수도 또한 일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수행이 일상에서 이탈될 때 그것이 곧 공염불입니다. 작가의 제작과정은 침묵을 동반합니다. 망치 소리, 그라인더 소리, 토치 불꽃 소리...... 그 소리 속에서 침묵을 보고, 자르고, 붙이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침묵의 소리를 잘 듣는 것처럼, 조각하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을 관조하고 걸러 담는 과정의 결여는, 침묵의 결여와 같습니다. ‘지극한 즐거움은 소리가 없다.(지락무성至樂無聲)’ 했습니다. 침묵이 소리의 근원인 까닭에 입니다. 내 안의 울림을 들을 수 있을 즈음. 세상 속 신음을 빠짐 없이 품어 안는 성자처럼, 작품은 비로소 평화를 안을 수 있습니다.

아침. 차들이 줄지어 도시로 향할 때, 산 속으로 역행하는 나는. 늘 침묵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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