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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나의 라디세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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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나의 라디세우스
  • 서경홍
  • 승인 2016.05.25 13:13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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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학자의 자전거 유럽 여행 (1)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풍경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확인시킨다.”


김훈은 풍륜과 함께 한 자전거여행을 언어적 풍경화로 옮겨 놓았다.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던 풍경과의 만남.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고 풍경의 그것을 어루만져 주었다.


여행의 시학이란 일상의 단조로움, 일과 분노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다른 풍경을 관찰하는데 있다고 헤세도 말한다. 여행은 단순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충족시키고 확인하는 게 아니다. 체험을 통해 새로 얻은 것의 유기적 수용과 다양성의 통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 그리고 옛것을 새로운 상황에서 재발견하는 것이다.


나의 자전거여행은 치밀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다만 곤궁함 속에서도 풍요가 필요했고, 세상에 대한 또 다른 나만의 이해가 요구됐을 뿐이었다. 그러한 여행의 모범을 나는 괴테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지난 학기 강의에서 괴테를 다루었다.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으며 괴테의 여행루트를 지도로 옮겨 놓았다. 그가 들른 도시, 체류기간, 구경한 것들을 따져가면서 나만의 지도를 만들었다.


칼스 바트에서 출발해 베네치아, 로마, 시칠리아에 이르는 경로에 체류기간과 구간거리를 표시했다.


제법 그럴듯했고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을 하룻밤에다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한번 그 길을 따라 가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막연한 생각이었으며 그게 실제 여행으로 이어 질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색연필과 종이한 장,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소중한 체험.





그 지도 위에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2015 나는 이탈리아로 간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도상여행을 어떻게 현 실세계로 옮겨 놓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괴테는 “오소리 가방하나 달랑 매고 남들 눈을 피해 도망치듯 칼스 바트를 빠져나갔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실제와는 달랐을 수도 있다. 더구나 나는 괴테가 아니다. 괴테의 경로를 따라 여행한다손 치더라도 그와 똑같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슷한 점은 괴테시대의 마차가 지금의 자전거가 아닐까 했다. 나는 자전거를 이동수단으로 정했다.
그 옛날 자전거는 사내아이들의 로망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흔이 넘도록 자전거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 사연을 늘어놓자면 나의 가족사까지 들먹여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오래전의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독일 유학시절 큰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기념으로 선물한 것이 내가 처음 산 자전거다. 가난한 유학생이 새 자전거를 산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 아이도 나처럼 어른이 될 때까지 자전거를 갖게 되지 못할까봐, 그래서 그 사연을 남들 앞에 늘어놓는 게 내키지 않았다. 새턴이라는 대형마트에 가서 자전거를 덥석 집어왔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하나는 예전과 변함이없었다. 그 자전거가 내 것이 아니라 그 아이것이었다. 그 자전거를 한국까지 가져왔다. 컨테이너 일부를 빌려 싣고 온 유학생의 살림살이를 본 누군가는 “웬 쓰레기들을 이렇게 다가져 왔느냐”고 했다. 자전거 프레임에 ‘Madein Germany’라는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었던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의 자전거보관대에서 사라졌다. 도둑을 맞은 것이다.


자전거 도둑. 어린 시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타라의 테마가 시그널 음악이었던 영화프로그램을 즐겨 보았다. 그 때 보았던 영화가운데 하나가 ‘자전거 도둑’이다. 빗토리오 데 시카가 감독했으며 전후 이탈리아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영화다. 영화학도는 물론 매니아들의 필수 감상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영화다.


주인공역을 맡았던 람베르토 마조라니는 길거리 캐스팅의 원조이기도 하다. 전쟁이 막끝난 직후의 이탈리아 로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아버지 안토니오는 어렵사리 포스터를 붙이는 일자리를 구한다. 그 일을 위해선 자전거가 꼭 필요했다. 어느 날 도둑이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 버린다. 힘을 다해 뒤쫓았지만 소용없었다. 안토니오는 어린 아들 부르노와 함께 무작정 자전거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뜨거운 태양빛이 작열하는 로마시내에서 끝내 자전거를 찾지 못한다. 안토니오에게 남은 것은 절망과 분노뿐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축구장 앞에 세워놓은 수 많은 자전거였다. 그 중 하나를 훔쳐 타고 달아나지만 서툰 도둑은 벌떼처럼 몰려든 군중들에 의해 금방 잡히고 만다. 군중과 경찰 앞에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안토니오의 시선은 아들 브루노를 향했다. 아들아 미안하다.


도둑맞은 자전거는 오히려 부자관계를 더 끈끈하게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됐을지도 모른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후에 김소진의 단편 <자전거도둑>을 읽었다. 그가 나와 같은 해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심이 갔고 내가 하고 싶었던 기자라는 그의 직업이 시샘을 일으켰다. 덕분에 그의 작품집 모두를 읽었다. 문체가 수수하면서 깔끔했다. 김광석이 죽던 그해 그도 세상을 떠났다.





주인공 <나>는 자전거를 도둑맞는다. 도둑은 다름 아닌 이웃집여자 서미혜. 공교롭게도 이들은 이 사건을 통해 서로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삶 앞에선 강인했지만 아들 앞에서 비굴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었다. 삶의 고단함으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초상이었다. 어쩌면 그 시대 모든 아버지들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또 많이 흘러 동네 쌀집 아저씨의 쌀배달에 사용하던 짐자전거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MTB란 것이 도심에 나타났다. 거리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자전거를 보며 “저 자전거는 웬만한 소형자동차보다 비싼 거래”하며 수군덕거렸다. 큰돈을 들여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헬멧과 버프 등 웬만한 장비를 갖추고 MTB의 페달을 보란 듯이 밟았다.


그럴 즈음 내게도 자전거가 생겼다. 누가 타던 거였다. 그 프레임에 새 바퀴와 구동계를 이식하고 핸들바와 안장과 같은 부품도 하나둘 교체하니 새 자전거가 탄생했다. 자전거공장에서 만들어진 완성차가 아닌 나만의 조립차, 일명 ‘커스터머’였다.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김훈은 자기 자전거를 ‘풍륜’이라고 했던가. 그럼 나는 뭘로 하지. ‘라디세우스’로 정했다. 바퀴라는 뜻의 독일어 ‘라트(Rad)와 <오딧세이아>의 주인공 ’오딧세우스‘를 합성해 만들었다.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바퀴여행자’다. 라디세우스가 길어 ‘라디세’란 애칭으로 불렀다. 라디세와 만난 지 5년쯤 되었을 때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으며 그렸던 지도를 다시 꺼내 보았다. 라디세가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라디세와 내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건 초여름의 어느 날, 어스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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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보면 2016-04-18 17:44:14
멋지십니다.
마지막 문단이 소설의 도입부인 것 같아 다음글이 기다려집니다.

디안 2016-04-14 15:09:43
오래전부터 자전거 생활 의 한부분 이었기 때문에 아주 관심있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 글이많이 기대되며 이 글을 읽고 언젠가 나도 자전거로 외국여행을 하는 큰 동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앨리 2016-04-14 14:38:16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라디세우스와 함께 하는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져요.^^
좋은 글 계속 부탁드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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