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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방어’ 위해 망각을 강요하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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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방어’ 위해 망각을 강요하는 그들
  • 박권일 시사칼럼니스트(‘88만원 세대’ 공저자)
  • 승인 2014.09.04 2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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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 세월호의 경제, 세월호의 정치


우언론이 주장하는 불황론, 실체 없다
‘불순한 유가족’ 프레임, 누가 만들었나?
약자 위협하는 ‘도덕주의적 반정치주의’


세월호 특별법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민의 목소리가 날로 거세지자 종편과 극우신문들은 일제히 정권 방어에 전력투구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세월호의 경제’, 다른 하나는 ‘세월호의 정치’라 부를 수 있겠다. 이들은 경제 이슈를 가지고 프레임 전환을 시도한다. 세월호 때문에 국가경제가 발목 잡혀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나섰다. 특히 <조선일보>는 ‘세월호 불황론’을 전면에 내걸었다. ‘세월호 딛고 부강한 나라로’ 특집 기사는 침체된 내수시장의 원흉이 세월호 참사인양 몰아간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 100일이 훌쩍 지났지만 내수 시장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전국적인 애도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은 여전히 지역 축제나 행사를 꺼리고, 기업들도 선뜻 대규모 대외 행사 재개에 나서지 않고 있다. 일반 시민들마저 씀씀이를 줄이면서 내수 의존도가 높은 영세 상인들과 골목상권이 직격탄을 맞았다. 생업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서민들을 위해서도 이젠 세월호를 딛고 일어서야 할 때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실일까. 물론 아니다. 한성안 영산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겨레> 칼럼에서 민간소비 감소가 세월호 이후 갑자기 발생한 일이 아니라 추세적으로 지속되어왔다고 말한다.


“전기 대비 민간소비는 2013년 4분기, 2014년 1분기, 2014년 2분기에 각각 -0.4%, -0.4%, -0.5%의 감소율을 기록하고 있다. 세월호 이전부터 소비는 이미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다.”


한 교수는 세월호가 여행, 숙박, 여가 등 서비스업을 침체시켰다는 주장도 일축한다. 그에 따르면 2014년 3월 100.1이었던 숙박업 생산지수는 세월호 이후 5월과 6월에 각각 107.2와 108.7로 증가했다. 음식 및 주점 생산지수 106.1에서 각각 110.1과 108.6으로 높아졌다.


이 와중에 극우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은 ‘초이노믹스’ 덕분에 경기가 살아났다고 칭송한다. 초이노믹스는 다름 아닌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최(choi)와 이코노믹스(economics)를 합친 조어다. 세월호 때문에 경기가 갈수록 침체한다고 특집기사까지 내놓고서, 최경환 덕분에 경기가 살아났다니 이 정도면 심각한 자아분열이다. 경제수장인 최경환 본인 역시 “국민이 절규할 정도로” 경기가 침체되고 있다고 한탄하다가 자기 정책 덕분에 경기가 살아났다고 하는 등 횡설수설 중이다.


초이노믹스의 핵심이자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가계 빚을 늘리는 형태로 소비를 진작시키는 방법이라는 점이다. 바로 그것이 부동산 규제완화와 금리 인하의 실제 내용이다. 근본적인 불황대책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가뜩이나 심각한 가계부채 위험을 더욱 키운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요약하자. 세월호 불황론은 허구이고 최경환의 경제정책은 거품이다.


종편과 극우신문들이 ‘세월호 불황론’보다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이슈는 ‘순수하지 못한 유가족’ 이미지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종편과 극우 신문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보상을 노린 파렴치한 내지 (과거 정치활동 혹은 노조 경력이 있는) ‘순수하지 못한 정치세력’으로 낙인찍었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순수한 유가족’이란 자식이 납득할 수 없는 사고와 정부의 대응미숙으로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요구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유가족이다. 즉, 세상에 실재할 수 없는 존재다.


왜 ‘순수한 유가족’/‘불순한 유가족’ 프레임으로 여론몰이를 할까. 그것이 ‘놀랍도록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잘 작동하는 이유는 적지 않은 시민들이 이 논리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정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저항하는 자의 순수성이 의심받는 순간 저항 자체가 산산조각 나버리는 일은 오래 전부터 되풀이되어 왔다. 피해자-약자는 도덕적으로 순결해야 하고 정치적으로도 순결해야 한다. 문제는 강자에게 동일한 잣대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자들은 정치적이거나 이기적인 게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지만, 약자는 정치와 어떤 연결도 있어선 안되고 보상 등의 금전적 이해관계를 들먹여도 안된다. 당연히 공정하지 않다. 논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현실에서 아주 잘 작동한다. 강자에 맞선 약자의 절규와 저항이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마는 배경에는 이런 이중 잣대가 도사리고 있다. 한쪽이 먼저 내야하는 가위바위보나 다름없다.


이중 잣대를 없애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을 정확히 지목해 무력화시켜야 한다. 정치를 ‘모리배의 협잡’ 아니면 ‘엘리트의 헌신’으로만 이해하는 ‘도덕주의적 반(反)정치주의’가 그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정치를 타자화하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왜소화하게 만드는 핵심 요인이다. 진보세력 역시 순수성을 투쟁 무기로 삼아왔기에 결코 책임에서 면제되지 못한다. 도덕주의적 반정치주의를 깨지 않는 한, 불공평한 게임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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