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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그것은 우리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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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그것은 우리의 눈
  • 이순구(화가, 만화영상박사)
  • 승인 2014.05.2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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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산책 | 티치아노와 루시안 프로이트의 누드
루시안 프로이트 <베너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 1995년, 캔버스에 유채, 151.3×219㎝
루시안 프로이트 <베너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 1995년, 캔버스에 유채, 151.3×219㎝
이순구 화가
이순구 화가

르네상스 시대, 이상화된 여체 묘사

현대미술, 미(美)에 더 이상 집착 안 해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나 눈과 직결된 마음이란 것은 참으로 알 길이 없다. ‘마음’을 가리키라 하면 대부분 가슴에 손이 간다. 상식적으로 머리의 두뇌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느끼는 것인데 왜 마음은 가슴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눈은 대상을 보고 그 정보를 두뇌로 전달한다. 이 정보를 통해 대상을 판단하고 느끼며 이 판단의 여부에 따라 이성적이거나 감성적인 울림이 되어 행동이나 생각으로 연결된다.

시각예술은 바로 이런 것을 새롭거나 또는 다르게 판단해보고 느끼고자 입체나 이미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보고 배운 것으로 판단력이 형성되고 그것을 응용하여 한 시대를 산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면 예술에 대한 우리의 판단력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요즈음 ‘관점(觀點)’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관점은 ‘사물을 관찰하거나 고찰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방향이나 생각하는 입장’을 말한다. ‘관점’은 개인을 만들고 단체를 만들며, 사회의 공동체를 만들고 국가의 정신을 만들며 세계적인 이슈를 만든다. 따라서 사회공동체의 방향은 개인의 관점에 의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도덕적이어야 하며 합리성과 올바른 순리와 이치에 부합하여야한다.

그러나 창의적인 과학이나 예술적인 것은 이 도덕성이나 합리성에서 꾸준히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창작이 갖는 도전이며 새로움이다. 시각예술에서의 ‘관점’이란 그 작품의 모든 것을 말하며 속성을 드러낸다. 오늘은 그 창작의 관점이 전혀 다른 두 인물화를 살펴보자.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년경~1576)의〈우르비노의 비너스 Venus of Urbino>(1538)는 이상화된 여체를 묘사하고 있다. 궁전의 커다란 방에 놓인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비너스는 빼어난 형태미를 보여준다.

티치아노,〈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 캔버스에 유채, 119×165㎝, 우피치미술관(이탈리아 피렌체)
티치아노,〈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 캔버스에 유채, 119×165㎝, 우피치미술관(이탈리아 피렌체)

그는 관능적인 이 느낌의 주제를 절제 있게 여러 번 반복해서 그렸다. 이 시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전성기였다. 그의 창작 시기는 베네치아 회화의 황금기와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경제적·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시대가 이쯤 되니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이상향의 여체는 당연한 것이다. 사회적인 이상향과 일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했으며, 폭넓은 정서를 가진 종교화인 성모상이나 신화를 주제로 그린 그림에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이교적인 쾌활함과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비너스의 표현은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관능성을 잘 나타내 후세의 루벤스나 니콜라 푸생 같은 대가들도 즐겨 모방했다고 한다.

반면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Michael Freud 1922~2011)는 20세기 작가이다. 20세기는 복합적인 양상의 미술사를 기록한 시대이다. 그의 1995년 작 <베너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Benefits Supervisor Sleeping)>은 아름다움이라고 하기에는 그 모델이 너무 과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는 주로 초상과 인체를 그리는데 이상향의 인체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추악함까지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그려내는 특징을 가진다. 그의 실재적인 표현법이 다른 작가와 다른 것은 그만의 독특함을 갖는 붓 터치에 의한 강박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이러한 비전통적인 기법은 티치아노의〈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비하면 얼마나 대상에 대해 무정하고 충격적인지 잘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만약 중세에 그려졌다면 아마 온갖 질타와 모멸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육체적인 추함의 표현이 가장 인간적인 면모에 근접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산 시대의 다양한 미술사조에 반하여 구상적인 사실주의 작가로 진부한 유형에 속한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의지로 작품을 그려온 결과이다. 그는 이러한 인체에 대한 관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통 나는 사람들 얼굴의 감정을 담고자 노력한다. 나는 사람들의 몸을 통해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감정은 관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늘어진 인체의 살들과 인체와 비슷한 중량감의 소파에 천박스럽거나 아무렇게 누워있는 자세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어딘지 소파와 인물은 딱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이 두 화가는 인체를 보고 무엇이 이토록 그리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었을까? 가장 이상적인 인체와 극단적으로 허물어진 인체 사이에는 어떤 관점들이 작용한 것일까? 첫째는 시대에 따른 개념의 차이일 것이다. 이 개념은 관점의 차이에서 오며 이를 반복하고 결국 시대의 예술사조는 ‘관점’에서 바뀌고 변화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느끼는 예술성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것을 흔히 발전이라고 말 하지만 예술의 가치관과 기능은 발전만으로 표현하기에는 그 상황이 미묘하고 복잡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예술은 발전이라 말할 수 없으며 ‘관점의 변화’로 예기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두 작품을 놓고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라하면 대부분은 티치아노의〈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선택할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이상적인 인체에 안정된 색체에 의한 도도한 멋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루시안 프로이트의 <베너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을 선택했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른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화법과 화가의 추구하고자하는 진솔한 인생을 그린 것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그림이 지난 200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3360만 달러(약 353억 원)에 낙찰된 작품이라면 이 시대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 짐작 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이것은 예술적 가치가 적어도 미(美)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한다. 미의 추동력이 미술의 근원이라 하지만 오늘날은 이런 편견을 버리고 그로테스크한 속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려하는 관점의 발현이다.

사람과 사람사이 예술이 존재한다. 예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인류사의 첨단 촉수이며 신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삶속에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든, 추함이든 그것의 가치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다. 그러기 전에 스스로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예술적인 감각을 일깨워 봄이 어떨까. 그러면 그 속의 진의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이사회 안에서의 나의 ‘관점’은 무엇을 지향하는지, 혹은 어떤 ‘관점’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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