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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삼성’을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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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삼성’을 말할 때
  • 김재중 기자
  • 승인 2014.02.14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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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약속’…한국사회 ‘속살’ 건드리다

삼성은 한국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
"경제가 본질이다" 영화 아닌 현실
삼성전기 세종사업장, 연중 집회신고 왜?

초인류 기업 ‘삼성’을 소재로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회성이 짙다는 점에서 천만 관객을 끌어 모은 영화 ‘변호인’과 여러모로 닮았다고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 가장 흡사하다. 두 영화 모두 ‘사실의 힘’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두 영화에서 ‘노무현’과 ‘삼성’이라는 ‘사실의 힘’을 뺀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개인이 국가와 기업에 항거하는 휴먼스토리는 약자인 개인의 승리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인기를 끌 만한 소재이고 이미 익숙한 레퍼토리다. 냉정한 평가일지 모르지만 두 영화는 스토리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참신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가 ‘힘’을 지니는 이유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실의 권력지형에서 가장 껄끄러운 소재를 과감하게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삼성’만큼 뜨거운 이야기 거리가 또 어디 있겠나. ‘용감한 시도’였기에 박수를 받을 만하다는 의미다.

금기의 벽, 강고하게 작동 중

물론 두 영화의 차이도 존재한다. 주변에서 영화 깨나 봤다는 자칭 영화광이나 평론가들은 대체로 ‘또 하나의 약속’에 후한 점수를 주는 분위기다. 여러모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상당수 사람들이 ‘또 하나의 약속’에 비교적으로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소액다수 투자, 노 개런티 출연, 상영관 축소 외압의혹, 배우들의 대관상영, 관객들의 지지 릴레이 등 스크린 밖 일련의 영화외적 요소들이 주는 감동이 더 크다. 제작자와 감독, 배우, 심지어 투자자와 관객까지 ‘더 큰 용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삼성’을 이야기하는 것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영화 속에 존재한다. 삼성의 영화 속 이름인 진성그룹 인사관리팀 실장은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빙고. 이게 해답이다.

달리 말하자면 ‘변호인’은 한국사회의 표면을 다룬 영화고 ‘또 하나의 약속’은 본질을 다룬 영화라는 이야기. 일단의 비평가들이 영화 ‘변호인’을 보고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다 붙이며 정권비판에 열을 올렸듯, 현 시점에서 ‘노무현’을 이야기하는 것에 그리 큰 용기가 필요하지는 않다. ‘변호인’을 보고 열광했다고 해서 신변의 위협 따위를 느낄 그런 세상이 아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약속’은 다르다. 아직까지 ‘삼성’은 한국사회 금기의 벽이며 최근 벌어지고 있는 상영관 축소의혹은 그 벽이 강고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필자는 삼성이 직접 나서서 상영관 축소 외압을 가했으리라 보지 않는다. 강력한 공포는 단 한 번으로 족하다. 공포가 각인된 대중은 ‘자기검열’을 통해 권력에 충성한다. 삼성 역시 이런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진보’도 자유롭지 않다

결국 삼성은 이 시대 한국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민주와 반민주, 진보와 보수 등 이분법적 사고로 삼성에 접근했을 때 우리는 더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단적으로 시대와 권력의 함수에 대해 살펴보자.

‘변호인’에서 국밥집 대학생 아들로 등장하는 박진우는 교양도서 몇 권을 읽었다는 이유로 처참한 고문을 당한다. 누가 가해자일까. 고문경찰, 검사, 이들에 동조한 판사? 사회과학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은 당시 사회 구조와 정치권력을 궁극적 가해자로 지목할 것이다. 당연히 신군부와 전두환 정권이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같은 논리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지켜보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실존인물 故 황유미 씨는 2003년 10월 삼성전자에 입사해 병을 얻은 뒤 2007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역설적이게도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에 삼성에 입사해 사망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해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진보정권을 자임했던 참여정부가 자유로울 수 없으며 삼성에 대해 ‘침묵하는 진보’ 또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황유미 씨와 같은 비극이 참여정부 시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권이 훨씬 더 취약했던 군사정권 시절 무수히 벌어졌던 일이고 참여정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빈발하고 있는 문제다. 그래서 황유미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고 우리가 떠안고 있는 숙제다.

결코 멀리 있지 않은 '삼성'

#1.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국회 연설에서 "복지재원 마련을 위한 최우선 과제는 바로 공평 과세"라며 "공평 과세는 삼성그룹에 대한 증세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 의원은 "우리나라 법인 총소득 가운데 삼성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5분의 1(18.33%) 정도인데 삼성그룹이 내는 세금은 10분의 1(10.86%) 밖에 안 된다"고 지적했다. 세금을 절반 정도밖에 안 내고 있다는 의미다.

#2. 본보가 충남지방경찰청에 정보공개를 요청해 입수한 세종시 집회신고 자료에 따르면, 세종시에서 가장 많이 집회신고가 이뤄진 장소 중 한 곳은 연동면 삼성길 25 ‘삼성전기 세종사업장’ 정문과 후문 이었다. 이곳엔 연중 집회신고가 이뤄지고 있으나 실제 집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 일부 대기업들이 노동관련 쟁의나 집회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시법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시간적으로 보나, 공간적으로 보나 '삼성'은 결코 멀리 있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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