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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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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하다
  • 김지용 영화감독(중부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 승인 2016.05.25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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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용의 시네마 쉐이크 | ‘황금시대’

격변의 중국, 천재 여성작가의 짧은 삶
현실 부정보단 인간의 본질에 더 관심
작가로 치열한 삶 산 어머니 인생 투영

삼십여 년 전 전 어머니는 당신의 이름이 박혀있는 원고지에 모나미 파란색 볼펜을 들고 원고지에 글자를 세로로 써내려갔다. 그렇게 밤새 드라마 대본 작업에 몰두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원고가 끝나고 잠시 짬이 생기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책을 읽다가 어느새 잠이 드시곤 했다. 일주일에 나흘은 그렇게 꼬박 밤을 새며 원고 마감일을 지키셨고 그 흔한 쪽 대본 한번 나간 적이 없었다고 지금도 그렇게 자랑하신다.


오랜 세월 동안 방송작가로서 힘들고 고된 삶을 사시면서도 오로지 자식을 키우고 교육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수십 년 동안 고혈을 짜 내며 수 십 만장의 원고를 써 나가셨다. 지금도 돋보기를 끼고 꽤나 능숙한 솜씨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원고를 쓰시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적어도 생존을 위한 글보다는 작품 자체에 몰두하는 모습이 더 여유롭고 원숙한 경지에 이른 예술가로서의 풍미마저 느껴진다.


‘10년의 시간 백여 권의 작품’ 이라는 광고 카피가 인상 깊었던 영화 <황금시대>는 천재 여류작가 샤오홍의 일대기를 다뤘다. 상처뿐인 세상에 오직 미친 듯이 글만 쓰고 싶었다는 그녀는 1930년대 격변의 중국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인들과의 자유롭게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샤오훙은 지주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으며, 가부장적인 가정의 억압과 부모의 일방적인 정혼에 저항해 집을 뛰쳐나왔지만, 결국 생존을 위해 남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 샤오쥔과 만난 후 그의 영향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와 동거에 들어갔다. 처녀작 <버려진 아이>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한 샤오훙은 이후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 갔다.


만주사변 이후 거세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동북 지역을 떠나 상하이로 간 이후 루쉰의 비호 아래 중앙 문단으로 진출했다.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그녀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샤오쥔과 헤어져 민족혁명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샤오훙은 산문시적 작법으로 인간의 애환을 담담하게 묘사한 <후란 강 이야기>를 발표하는 등 창작을 향한 열의를 놓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건강이 악화된 샤오훙은 1942년 투병 중이던 홍콩에서 고통으로 점철된 짧은 생을 마감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여성 참정권이 비로소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천재 여성 예술가’의 일생이 얼마나 기구할지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 카미유 클로델, 프리다 칼로 등의 인생이 지극히 전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샤오홍의 인생 또한 비극으로 점철돼 있다.


<황금시대>는 당시 그녀의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삶에 대해 소개하는, 인터뷰 형식으로 영화가 전개되며 철저하게 샤오홍이라는 여성성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뜨거웠던 사랑과 여성으로서 짊어져야만 했던 당시 삶의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샤오홍은 그녀의 치열했던 삶 속에서도 홀로 일본에서 생활하던 시절을 자신의 황금시대라고 말한다. 지극히 평범하며 글을 쓰고 차를 마시고 지인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작가로서 인정은 받지만 늘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 여성의 일생을 <심플 라이프>로 유명한 허안화 감독이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하고 수려한 비주얼로 연출하고 화제의 여배우 탕웨이가 열연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샤오홍의 작가로서의 치열한 삶의 모습이 어머니의 인생에 투영됐다. 1980년 대 지극히 보수적이며 마초적인 남성들로 가득 차있던 방송국에서 여류 작가로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밤새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힘들게 버티면서도 사회구조에 담긴 불평등이나 불만 등 어떠한 정치적 성향도 배제한 채 글에 담긴 따스한 정서만으로 당시 시청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1980년대 말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는 홀로 세 아들을 키우며 작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간 어머니의 인생이 함께 담겨있었다.


최근 정치나 사회적 이슈를 담은 소규모의 영화나 예술 직품들이 세간의 이런 저런 말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7080세대의 저항 예술 움직임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모두가 다 같은 생각일 수는 없지만 본연의 작업 속에서 현실을 부정하기보다 시대의 아픔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샤오홍은 정치에도 역사에도 관심 없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글을 쓰며 어쩌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잊고 살지 않았나 싶다. 그처럼 그저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하다보면 역사 속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걸작들이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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