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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의 상실, 고전 재해석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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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의 상실, 고전 재해석의 실패
  • 황혜진 교수(목원대 TV·영화학부)
  • 승인 2016.05.25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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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사회 | ‘마담뺑덕’

본질 간직하며 현실 적용하는 시선의 깊이 없어
욕망의 파국에 현대판 청이가 끼어들 필요 있나
진부한 소재가 진정 치명적이려면 더 솔직했어야


수차례 영화로 제작될 만큼 유명한 고전 <춘향전>을 재해석한 <방자전>(감독 김대우, 2010)이 꽤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사랑에 대한 춘향과 방자의 욕망과 유명해지고 싶은 몽룡의 욕망, 색을 탐하는 변학도와 향단의 욕망이 서로 교차하면서 결국 열녀 미담의 생산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사극영화에서 독보적인 감각을 자랑해왔던 김대우 감독의 손을 거쳐 제법 그럴 듯한 모양새로 탄생했다. 사극영화의 꾸준한 흥행 세는 물론이거니와 과거의 재현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에 힘입어 판소리나 고대소설은 무궁무진하게 현대적으로 재해석될 가능성을 가진 원천 스토리의 보물창고가 된 듯하다.


<마담뺑덕>(감독 임필성) 역시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효녀 심청의 이야기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현대화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그 자체로 이미 영화의 마케팅 포인트로 이용됐다. 영화의 한 줄 콘셉트가 ‘치명적인 멜로’라는 점은 원작과의 확연한 거리두기를 자신하는 일종의 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놀부의 자본가적 정신을 높이 사고 흥부의 무능력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새로운 읽기와 유사하게 <심청전>에 대해서도 어린 딸과 아버지의 오이디프스적 관계에 주목한 정신분석학적 독해가 이미 이뤄진 바 있다. 입장에 따라서는 억지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봉사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수발했던 어머니가 자신을 낳다가 죽었다는 사실이 어린 청이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한 나머지 거의 자학적으로 효에 집착하며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 했다는 해석은 한국의 착한 딸들에게 그럼직하게 수용될 법하다.


이야기의 무대를 현대로 옮긴 <마담뺑덕>은 청이의 효심을 더욱 빛나게 하는 장치에 불과한 심학규와 뺑덕 어멈의 인연에 초점을 맞춘다. 성추행 사건으로 우울증에 걸린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지방에 내려와 평생교육원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하는 젊고 이지적인 교수 학규는 취미를 찾아 적응해보라는 동료의 조언에 놀이공원 매표소의 어린 처녀 덕이와 연애를 시작한다. 도시의 냄새를 한껏 풍기는 지식인 남성은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덕이에게 단연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을 터! 이 관계는 물론 법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학규의 감정이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좌절에서 온 자기기만이거나 타인의 삶을 배려하지 않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데 있다. 연애가 상대에 대한 자기헌신을 전제로 한다면, 덕이에 대한 그의 연애감정은 자신의 고독과 무력감을 잊기 위해 상대를 착취하려는 천한 자본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당연하게도 이 연애의 끝은 추문에서 벗어나 복직된 학규의 배신과 덕이의 절망이다.


도덕적 파산에도 불구하고 성공가도를 달리던 학규에게 내려진 징벌은 질병으로 인한 시력의 상실이다. 아내의 자살과 아버지를 거부하는 청이로 인해 자못 외로운 중년의 아우라를 풍기던 그는 도박장 출입사실이 알려져 대학에서도 퇴출당한다. 그리고 드디어 복수의 화신이 된 덕이가 나타난다. 더할 수 없이 헌신적인 이웃으로 청이의 대리 어머니가 되고 학규의 간병인을 자처하며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연인의 파멸을 조작하는 덕이는 막장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닮은 탓에 낯설지 않다. 더욱이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도덕적인 명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이의 복수에 공감하기 어려운 것은 영화의 초반 서사가 연애라는 욕망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을 뿐, 이별의 통한을 재현하는 데 공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규의 내레이션을 통해 남성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예정된 실패라고나 할까? 흡입력을 잃은 영화는 더 나아가 일본으로 팔려갔던 청이가 돌아와 덕이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황당한 엔딩을 맞는다. 덕이의 각막이 학규에게 이식되고 시력을 회복한 학규가 덕이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는 다소 엽기적인 결론은 치명적 멜로가 주는 보너스다.


고전의 재해석은 자유로운 상상을 전제로 하지만 그 핵심은 고전의 메시지가 주는 본질을 간직하면서 변화한 현실에 적용하는 깊이 있는 시선이다. 이를테면 심청 이야기의 본질은 효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애증 가득한 드라마다. 당대의 심리적 혹은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한 성찰만으로도 억압된 진실을 드러내는 흥미로운 서사의 장이 펼쳐질 수 있다. <마담 뺑덕>이 굳이 <심청전>을 원작으로 선택한 까닭이 이해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엇갈린 욕망으로 인해 파국을 맞은 연애의 비극에 현대판 청이가 끼어들 필요가 없으며, 이미 흔한 소재가 되어버린 나쁜 남자와 청순한 처녀의 조합이 진정 치명적인 이야기가 되려면 이 영화는 더 솔직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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