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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가부장의 몰락과 암울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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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가부장의 몰락과 암울한 미래
  • 황혜진 교수(목원대 TV·영화학부)
  • 승인 2016.05.25 1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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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사회 | ‘해무’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


침몰하는 배 지키려는 철주
중첩되는 관객 자신의 모습


사극영화 세 편이 흥행 각축을 벌이고 있는 여름 극장가에 연우무대 창단 30주년 기념작을 영화화한 <해무>(감독 심성보)가 상륙했다.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던 <살인의 추억>과 <왕의 남자>의 원작 <날 보러 와요>와 <이>의 원작을 공연하기도 했던 연우무대의 작품인 터라 <해무>에 대한 기대는 적지 않았다. 한국 최고의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봉준호가 기획과 제작을 맡았다는 사실 역시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게 했다.


그러나 적어도 흥행 면에서 결과는 참패에 가까운 듯하다. 선제공격으로 체면을 지킨 이색 사극 <군도>나 충무공의 리더십에 전국을 들썩이게 하고 있는 <명량>, 코믹 액션으로 차별화에 성공한 <해적>과 견주기에 이 영화의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호의적인 비평을 고려한다면, 혹시 이 영화가 관객을 불편하게 한 지점에 그 어떤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닐까?


IMF 외환위기가 몰아쳤던 시절, 불경기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는 여수에 과거에는 출항 때마다 만선으로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이제는 감척 대상이 된 전진호와 선장 철주가 있다. 어떻게든 전진호를 살리고 싶은 철주지만, 고철이 되어가는 낡은 배를 살릴 뾰족한 수가 없듯이 그는 불륜현장을 들키고도 가장의 무능을 탓하는 아내에게 큰소리 한번 치지 못 한다. 이제 무너진 가장의 권위를 되찾고 끈끈하게 맺어져 마치 가족과도 같은 선원들에게 두둑한 돈 봉투를 전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가 철주에게 주어진 과제가 된다. 막다른 길에 처한 남성의 고군분투!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가?


식민과 전쟁, 그리고 국가 주도의 급격한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은 대개 소수의 누군가에게는 달콤했을 현실이 자신에게는 한없이 팍팍하게 여겨졌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믿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의 거품경제가 가져다준 역설적 선물이었지만, 불룩해진 주머니와 민주화에 대한 열기 혹은 미래에 대한 낙관이 묘한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불어 닥친 세계화의 바람이 함께 몰고 온 금융위기는 뉴욕과 서울의 증시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쳤으며, 구조조정은 가장 두렵지만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불경기는 견고하다고 믿어왔던 외적인 세계의 붕괴와 함께 가족이 해체되는 또 다른 현실을 목도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성별을 따져 그 곤궁함의 정도를 논하자면, 남성 가부장의 그것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해무>는 바로 이 상황에 영화적 시선을 들이댄다. ‘전진호’라는 철주의 배 이름이 상징하듯, 앞만 보고 달려가면 고생한 만큼의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시절. 그러한 믿음이 어느 순간 여지없이 깨진다면? 그래서 생존을 위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철주의 막다른 선택은 자신의 배에 중국에서 밀항한 사람들을 싣는 것이다. 대부분이 조선족인 그들은 돈을 벌거나 먼저 떠난 가족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집을 떠난 사람들이다. 타인에게 전적으로 자신들의 목숨을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주를 비롯한 선원들에 비해 약자다. 철주는 동료선원과 이들을 통제해서 무사히 과제를 완수하고 잔금을 받아야 남성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배도 살릴 수 있기에 점점 과격하게 변해간다.


비극은 해경의 감시를 피해 어창 속에 숨었던 밀항자들이 가스 누출로 목숨을 잃는 데서 고조된다. 시신을 싣고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철주가 선원들과 함께 밀항자들을 해무로 뒤덮인 바다 속에 던져버리는 순간, 최소한의 윤리의식에 길들여왔던 인간성이 증발되면서 전진호는 원시적 야수성이 지배하는 공간이 된다. 살아남기 위해 혹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사건은 우연이라기보다 위기 앞에서 드러나기 마련인 인간성의 또 다른 측면이다. 불가항력적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던 철주가 침몰하는 배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에서 생존을 명분으로 무한경쟁을 선택한 우리들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그래서 <해무>는 섬뜩하다. 그리고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다.


에필로그는 전진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선원 동식과 조선족 처녀 홍매의 미래 역시 우울하게 바라본다. 육지의 공사현장으로 노동의 공간을 옮겼을 뿐, 여전히 탁한 환경에서 몸을 파는 동식은 자신을 떠난 홍매를 찾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이는 거리를 떠돌지만 그들이 비숙련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안식은 없다는 게 이 영화의 전언이다. 어쩌면 모두가 죽는 결말보다 더욱 혹독할지도 모르는 이러한 엔딩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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