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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한 거장의 아쉬운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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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한 거장의 아쉬운 역사관
  • 김지용(영화감독, 중부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 승인 2016.05.26 0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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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쉐이크 |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

전범 미화 논란 부른 명장의 은퇴작

김지용 감독
김지용 감독

지브리 스튜디오는 21세기 들어 가장 큰 변화와 도전의 기로에 서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74)의 은퇴 선언에 따른 후폭풍도 예상돼 왔다. 보다 큰 문제는 그의 마지막 은퇴작품이 민심이반을 불러왔다는 데 있다.

<바람이 분다(2013)>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의 전투기를 설계한 호리코시 지로의 삶을 영화화했다. 전범을 미화했다는 논란으로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가의 비난을 받으며 공식상영조차 힘들었던 작품이다. 노회한 거장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작품으로는 그의 역사관이 조금은 의심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다만, 수십 년 동안 일관되게 보여 온 자신만의 이야기표현, 그리고 단순한 정치·역사적 사실관계를 떠나 다른 각도에서 작품을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는 건 다행스럽다.

1978년 <미래소년 코난>으로 시작된 하야오의 작품들은 지브리 스튜디오를 만들면서 그 꽃을 피우게 된다. <천공의 섬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반딧블의 묘> <바람계곡의 나오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1990년 초반 일본 유학시절, 국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며 일종의 희열과 포만감을 안고 일본어 공부를 했다. 그의 그림 속에 녹아있는 캐릭터들의 사실적 표현과 환경에 대한 꾸준한 그만의 철학은 작품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영화감독을 꿈꾸던 내게 전혀 거부감 없이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뮤즈로 다가왔다.

당시 도쿄에 갔을 때 지브리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여러 가지로 놀란 적이 있다.

첫 번째 생각보다 작은 공간에, 두 번째 화려하지 않아 놀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위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이 필요한 셀 작업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어서 놀랐다. 이미 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애니매이션들은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을 도입하고 영화 못지않은 장대한 스케일의 화면을 디지털 방식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때문에 일종의 아날로그 수작업을 고수하는 지브리 스튜디오 사람들의 열정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섬세한 손길로 빨강 머리 앤의 미묘한 감정 표현을 완성해 내는 그들만의 방식은 원작자 입장에선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태생이 만화가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겐 어쩌면 그러한 세월의 변화가 더 못 미더웠는지 모르겠다.

수많은 작품들의 영감을 반경 몇 백 미터 내에서 찾아낸다는 감독의 스타일은 어쩌면 자신이 설립한 지브리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바람이 분다>에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서정적 연출과 역경 속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지로의 모습을 통해 현대 일본인들을 위로하려는 감독 특유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성이 깃들여있다. 또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듯 차분하고 관조적인 비행 장면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대단히 유려하게 잘 표현된 명장면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가미카제로 불리는 살상용 전투기 제로센을 미화했다는 비난에서 만큼은 이 작품도, 미야자키 감독도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작품 속에 등장하는 미츠비시 중공업은 아시아인들을 강제 징용해 전투기를 만드는데 동원했던 아픈 역사가 있는 만큼 <바람이 분다>에 대한 주변국 및 서구의 시선이 곱지 않다.

최근 몇 년 동안 일본의 우경화 바람은 우려의 경지를 넘어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다. 한일 관계 또한 근래 들어 최악이다. 이러한 시기에 만들어진 <바람이 분다>를 통해 감독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기를 사용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드는 데 대한 의문은 저와 스태프에게도 있었다. 정의는 보장되지 않고, 시대의 왜곡 속에서 꿈이 변형되고, 고뇌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살아야만 하는〔…〕 그런 건 사실 현대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 운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말했다.

청소년 시기와 청년기, 그리고 이제 막 중년으로 접어들고 있는 나에게 지브리 스튜디오와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서재의 마스터 컬렉션이 되어있다. 또한 과거의 아련한 향수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매개체이기도하다. 때문에 불거진 논란과 비판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작품을 보고 싶은 열혈 팬덤의 한명으로서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2013년 베니스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고 아카데미상에서 각본상까지 수상한 노회한 거장의 은퇴작은 과연 잊혀져가는 역사의 한 선에 서 있는 한일 젊은 세대들에게 각각 얼마나 다른 시각의 철학을 심어 주게 될지 심히 염려스러운 부분이기도하다.

"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 〔…〕 세찬 바람은 내 책을 여닫고, 파도는 분말로 바위에서 솟구치나니! 날아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버려라 〔…〕 삼각돛들이 모이 쪼던 이 조용한 지붕을! <바람이 분다>의 대화 내용 중 반복되어 언급된 폴 발레리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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