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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에 나선 아버지의 절규,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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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에 나선 아버지의 절규, 무엇을 남겼나
  • 황혜진(목원대 TV·영화학부 교수)
  • 승인 2016.05.26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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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사회 | ‘방황하는 칼날’

공권력에 대한 절망과 분노, 왜 내 딸이?

윤리적 돌파구 찾지 못하는 불안감 반영

황혜진
황혜진

가족은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기본 단위이다. 그러므로 가부장에게는 권위와 함께 가족 구성원을 지키기 위한 의무가 주어진다. 숨 가쁜 속도로 진행된 근대화 과정 동안 한국의 가부장들은 경제적 부양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흔히 전쟁터로 일컬어질 만큼 혹독한 경쟁의 장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전투에 몰두한 탓에 돌보지 못한 정서적인 책무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버지의 빈자리에 대한 담론들이 우스개로 진화되어 유통되기도 하고 젊은 가장들은 ‘친구 같은 아빠’를 이상화하며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정서적으로 분투하고 있다. 사회에 저당 잡혀왔던 남성성을 친밀한 관계가 중시되는 가정에 적합한 형식으로 변환하기 위한 노력은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방황하는 칼날>의 한 장면
<방황하는 칼날>의 한 장면

그러나 팍팍한 현실이 이러한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는 가장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으며, 그 무게를 견디는 동안 제도의 밖에서 흉포하게 사육된 괴물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만약 절실히 지키고자 했던 가정이 이 괴물들에 의해 파괴된다면, 그래서 모든 것이었던 자식을 잃은 가장이 사적 복수를 감행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인가?

<방황하는 칼날>은 범죄로 딸을 잃은 아버지 상현이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사적 복수를 감행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여기에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입장이 바뀐 그를 쫓는 형사 억관의 감정적 동요를 더해 소년법의 모순과 사적 복수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중한 업무로 연일 야근을 하는 상현에게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기란 역부족이다. 스키장에 가보고 싶다는 중학생 딸 수진에게 퉁명스러운 대답을 들려줄 수밖에 없고 함께 장을 볼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어질러져 있는 집안 풍경처럼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리라고 믿고 있던 상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수진이 강간,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십대들의 탈선 장소인 폐허와 다름없는 목욕탕에 쓰레기더미와 함께 버려진 소녀의 모습은 처참하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현에게 담당형사 억관은 범인을 잡을 때까지 그저 집에 돌아가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고 말할 뿐이다. 경찰서 밖의 차가운 어둠 속에서 상현은 그저 이렇게 무력하게 기다리는 것이 정말 최선이냐고 반문한다.

공권력에 대한 적극적 불신이라기보다 극단의 절망과 분노, 왜 내 딸이어야 하냐는 의문이 상현을 복수에 나서게 한다. 시작은 충동적인 것이었다. 범행에 수동적으로 동참했던 소년의 제보 문자를 받고 정신없이 찾아 나선 범인의 집에서 딸이 마지막 순간이 담긴 동영상을 본 그에게 이성적 판단을 기대할 수 있을까? 증거를 없애거나 피 묻은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이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된 상현은 얼굴도 모르는 두 번째 범인을 찾아 강릉으로 떠나고 경찰의 추격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어린 소녀들의 성을 고부가가치의 상품으로 거래하는 자본의 추악한 이면과 선악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자들의 몰염치한 얼굴이 드러난다. 윤리적 무감각! 집을 나와 머물 곳을 찾는 소녀들은 미래를 꿈꾸지 않기에 스스로를 방치하고, 정상성의 외부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화폐 축적의 수단으로 삼는 비열한 성인들은 소녀들의 자포자기를 이용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값싼 쾌락에 몸을 맡긴 십대 소년들이 있다.

견고한 먹이사슬 속에서 포식자의 위치를 차지한 악을 처단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일까? 개인은 무력하고 국가의 공권력은 너무 멀리 있거나 충분치 않다. 영화 홍보기간 중 실시한 페이스북 설문조사에 참여한 23만이 넘는 국민들의 91.5%가 상현의 사적 복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답했다. 법이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도 상현과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답은 감정적 산물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많은 영화들이 사적 복수에 관해 말해온 것은 이러한 대중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현실에서 개인이 범법자를 응징할 물리적 힘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스크린 속에서나마 무력한 그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쥐어주는 것, 그것이 영화가 제공할 수 있는 상상의 해결책인 것이다. 그러나 상현의 복수는 미완으로 남았고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현재와 같은 패러다임이 지속되는 한, 여전히 이 사회가 윤리적 돌파구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 죽음 직전에 흘린 상현의 눈물에 비겁하게 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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