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스크린을 통해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
상태바
스크린을 통해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
  • 황혜진(목원대 TV영어학부 교수)
  • 승인 2016.05.26 09: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로운 제작·배급 성공사례 남겨
진실, 땅에 묻혀도 싹 틔우는 법

황혜진(목원대 TV영어학부 교수)
황혜진(목원대 TV영어학부 교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가파른 속도로 천만 관객 동원을 향해 순항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예매율과 좌석 점유율이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압에 의해 상영 스크린 수가 줄었다는 의혹의 중심에 선 한국영화 <또 하나의 약속>(김태윤)이 있다. 흔히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고 일컬어지는 굴지의 대기업과 관련된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니 이 의혹은 단지 마이너 제작사나 배급사가 느끼는 피해의식의 산물만은 아닌 듯싶다. 개봉 당시 스크린 수는 80여개에 불과했다.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가 전국 스크린 수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 멀티플렉스들에게 외면당하는 경우, 해당 영화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관객의 볼 권리, 좀 더 광범위하게 말해 문화의 다양성을 보장하자는 주장은 냉정한 현실논리에 부딪히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물론 아직 정확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감독은 ‘제작과정에서는’ 별다른 외압이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영화는 삼성반도체에 근무했다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양의 아버지가 산재 판정을 받기 위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이는 재판을 벌여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실화에 근거한 영화 스토리텔링은 이제 친숙한 것이 되었다. 아직 개봉관에 걸려 있는 <변호인>은 물론 <살인의 추억>과 같은 스릴러에서 <우리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과 같은 스포츠 영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입법으로까지 이어졌던 <도가니>까지 대부분의 팩션 영화는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흥행은 물론 비평에서도 선전해 왔다. 특히 <도가니>는 잔혹한 현실의 단면을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영화의 사회적 기능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영화가 실제 세계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것은 관객대중의 절대적인 호응이 이끌어낸 결과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또 하나의 약속>은 <도가니>와 유사한 계열에 속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평생을 택시기사로 살아온 아버지의 차를 바꿔주고 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겠다는 소박한 꿈을 안고 대기업에 입사한 딸이 21살 어린 나이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답답할 정도로 세상을 순진한 눈으로만 바라보던 아버지는 여전히 갑의 입장에서 불평등한 협상을 요구하는 회사와 죽음 앞에서 절박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딸에게 약속한다. 반드시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고 산재 판정을 받아내겠다는 그의 약속은 마침내 세계 최초로 반도체 회사 근무자의 산재를 인정하는 1차 판결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드레퓌스 재판 과정에서 ‘진실은 땅에 묻히더라도 반드시 그 싹을 틔운다’고 했던 에밀 졸라의 말처럼 대기업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통제되었던 진실이 결국 드러났다. 그 순간 이 영화가 보여준 진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곳의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있는 힘의 논리가 이제껏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모든 것들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에 참여하게 하는 방식이다.

영화의 내용이 전달하는 메시지와 더불어 <또 하나의 약속>의 미덕은 새로운 제작, 배급방식의 성공사례를 보여준 데 있다. 이러 종류의 영화가 기획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어려움은 제작비를 확보하는 것이다. 팩션에도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고 충분히 오락적일 수 있지만, 최근의 사회적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관객에게 사회적 현실을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일종의 교육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통해 안전한 환상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관객의 욕망을 외면하는 상업적으로 무모한 기획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크라우드 펀딩(crowed funding)으로 이와 같은 문제를 극복했다. 크라우드 펀딩이란 인터넷과 같은 플랫폼이 제공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사업의 취지에 공감하는 다수의 개인들로부터 소규모 투자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제작비의 일부를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조달한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굿펀딩과 제작두레, 개인 투자자를 통해 제작은 물론 배급 관련 비용 전액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 첫 번째 사례로서 그 특별함이 있다.

상업영화의 제작과 배급이 충무로를 떠나 대기업의 전유물이 된 지 오래다. 영화의 예고 영상을 스마트한 대형 화면에 화려하게 전시하는 멀티플렉스의 라운지에서 대형 용기에 담긴 고칼로리의 팝콘과 콜라를 소비하는 것이 영화 관객의 스타일이 된 요즘, 더불어 살고 있는 이웃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든 영화 한 편이 더할 수 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Tag
#NUL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