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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이프’ 산 언어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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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이프’ 산 언어철학자
  • 정승태(침례신학대 종교철학)
  • 승인 2013.11.25 1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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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제자 노먼 맬컴의 회상록 ‘비트겐슈타인의 추억’, 필로소픽 펴냄
비트겐슈타인의 제자 노먼 맬컴의 회상록 ‘비트겐슈타인의 추억’, 필로소픽 펴냄

서양 철학사를 통틀어 언어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회의하고 분석한 철학자가 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이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회의(懷疑)와 분석 그 자체가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지성의 혼돈과 미망에서 벗어나 오로지 삶의 진실과 마주하려는 철학적 고투가 그의 삶이었다. 20세기의 전설적 철학자이자 철학적 전설로 전해 내려오기도 하는 그의 삶은 어떠했는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멋진 삶’은 1889년 4월 26일 저녁 8시 30분, 오스트리아 빈 근교 노이발덱에서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과 어머니 레오폴디네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면서 시작되어 비엔나의 알레가세 16번지를 무대로 펼쳐졌다. 유대계 가문이었지만 아버지는 개신교이고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는 철강 재벌, 어머니 레오폴디네는 피아니스트이자 예술 후원자였다. 브람스, 클라라 슈만, 구스타프 말러, 브르노 발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비트겐슈타인의 집을 드나들었고 그의 부모는 쇤베르크, 파블로 카잘스 등을 후원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형 파울은 피아니스트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오른 팔을 잃었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은 그를 위해 작곡된 곡이다. 비트겐슈타인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교향곡 전체를 휘파람으로 불어 동료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비트겐슈타인 가(家)는 빈 분리파 예술가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비트겐슈타인의 막내 누나 마르가레테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자기 몫의 유산을 물려받은 비트겐슈타인은 예술가 후원 자금으로 10만 크로네를 기부했고,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이 가운데 2만 크로네를 지원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정교사들에게 지도 받다가 1903년 린츠 국립실업학교에 입학했지만(히틀러는 1904년에 입학)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친구들과 잘 사귀지도 못했다. 동급생들은 재벌가 ‘도련님’을 공공연하게 따돌렸다. 벌레를 심하게 무서워했고, 말을 더듬는데다 너무 격식 차린 표현 때문이었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의 불행을 겪는다.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집을 나간 맏형 한스가 1902년 미국에서 실종됐다. 자살로 추정된다. 셋째 형 루돌프는 1904년 베를린에서 청산염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째 형 쿠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에서 역시 자살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역시 자살의 충동을 여러 번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1906년 비트겐슈타인은 아버지의 권유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기계공학부 연구생으로 등록해 항공 엔진과 프로펠러 제작을 연구했다. 이 시기부터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의 근본에 관한 문제, 수학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케임브리지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만났다. 다음은 러셀의 회고다. "처음에 그는 기술자가 될 생각으로 맨체스터로 갔다. 수학 책을 읽다가 수학의 원리에 흥미를 느끼고, 수학 분야에 누가 있는지 맨체스터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거론하자 그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로 짐을 싸 들고 왔다. 그는 정열적이고 심오하고 강렬하고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천재의 완벽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12년 가을 학기부터 그가 어떤 자세로 철학에 임했는지, 그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베토벤의 방문 앞에서, 그가 새 곡을 놓고 저주하며 신음하고 노래하는 것을 들은 한 친구가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 드디어 베토벤이 문을 열었다. 그는 마치 악마와 싸웠던 사람 같았고, 그의 격노를 피해 요리사와 하녀가 떠났기 때문에 36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케임브리지에서 러셀을 통해 G. E. 무어와 경제학자 케인즈 등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철학에 몰두하던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노르웨이의 협만 근처 시골 마을에 칩거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군에 자원입대하여 포병으로 동부 전선과 남부 티롤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 11월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됐다. 전쟁터에서도 그는 수첩에 자신의 철학을 부지런히 메모했다. <논리철학논고>가 사실상 완성된 것도 1918년 8월의 일이다. 이 책의 독영 대역본은 1922년에 출간되었다.

1929년 초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같은 해 6월 <논리철학논고>를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트리니티 칼리지 연구원이 됐다. 당시를 회고하는 제자 노먼 맬컴의 말이다. "그것은 강의라기보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 그 자체였다. 그는 질문을 던졌고 학생들의 대답에 다시 반응했지만, 때때로 어떤 생각을 짜내려 할 때는 학생들의 말을 멈추게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간헐적인 중얼거림과 좌중의 숨죽인 시선이 이어지는 긴 침묵. 그는 극도로 긴장되어 눈은 한 곳을 응시했고 표정은 준엄했으되 얼굴에 생명감이 넘쳤다. 그럴 때면 학생들은 자신이 고도로 심각하게 몰입되고 지적인 힘이 충만하게 된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30년대 전반 그는 강의와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다 1935년에는 철학교수가 아닌 노동자로 살아가고자 했다. 그는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지만 포기하고 돌아왔다. 1936년 봄 연구원 임기가 끝나자 다시 노르웨이의 협만 오두막에 칩거했다. <철학적 탐구>의 제1부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곳에서였다. 1937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왔고 1939년에는 G. E. 무어의 후임으로 철학과에 임용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교수취임을 하지 않고 런던의 가이 병원 약국의 배달 사원으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왕립진료소 임상연구 실험실에서 일했다. 1944년 가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그는 1947년 사임했다. 그는 철학 교수로서의 삶을 ‘살아 있는 죽음’으로 묘사했다. 케임브리지를 떠난 그는 잠시 아일랜드에서 살았다. 골웨이 해변 오두막에서 지내는 그를 주변 어부들은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1949년 코넬대학의 노먼 맬컴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 잠시 머물고 돌아온 뒤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1951년 1월 29일 비트겐슈타인은 옥스퍼드에서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하여 유언 집행인과 문헌 관리자들을 지정했다. 1949년 10월에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던 터였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의 주치의 이븐리 베반 박사의 집에서 색채의 문제와 확실성의 문제에 관한 글을 작성하는 데 전념했다. 4월 27일에 위와 같은 확실성에 관한 글을 쓰고 다음 날 저녁 의식을 잃었다. 결국 이 글은 그의 생애 마지막 글이 되었다. 1951년 4월 29일 아침 62세를 일기로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내가 멋진 삶을 살았노라고 사람들에게 전해주시오(Tell them that I had a wonderfu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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