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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 없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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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 없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 이계홍
  • 승인 2021.05.10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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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시선] 한국의 성씨를 중심으로 살펴본 편견과 차별 톺아보기
남북 분열, 지역 대결, 색깔론 등 '통치 프레임'에 휘둘리지 말아야
통계청이 발표한 성씨별 분포도 ⓒ 통계청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우리나라 전체 인구가 본격적으로 성씨를 갖게 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러니까 보편화한 성씨 역사가 멀리 잡아도 150년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나라 성씨의 역사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6세기부터 왕실 귀족이 먼저 사용했고, 고려가 건국된 직후인 940년(태조 23년) 무렵 토성분정(土姓分定·각 지역의 토착 세력에게 男系혈연의 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상민 이하의 계급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오개혁부터 하층민에게도 성씨와 이름이 부여됐다. 물론 그때도 100% 부여된 것은 아니지만, 전보다 상대적으로 보편화된 것이다.

갑오개혁은 갑오경장이라고도 하는데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20개월간 3차례에 걸쳐 추진된 사회·행정 개혁 운동이다.

이때(1894) 반봉건·반외세 운동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조정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때 일본이 중일(中日)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을 개혁하자는 구실로 참여했다. 청나라가 이를 거절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승리로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지배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관군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동학농민혁명군을 공주의 우금치 전쟁에서 궤멸시켰다.


숨 가쁘게 개입한 일본의 만행들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를 을사늑약이 체결된 1910년을 기점으로 보지만 실상은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일수호조약부터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일수호조약은 군사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에 이어 인천, 원산을 개항하게 되었고,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명성황후 시해(1895) 등 역사적 사건마다 숨 가쁘게 일본의 개입이 있었다.

일본 건국일을 맞아 학생과 교사들이 연산시가를 벗어나 논두렁길을 행진하고 있다. 야산에 양식건물과 초가집, 창고가 있었다. 1938.2.11.
1938.2.11. 일본 건국일을 맞아 식민교육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은 연산시가로 세종포스트 참고 자료 ⓒ 세종포스트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의 위협에 놀라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도망가 1년여 동안 숨어 사는 등(아관파천)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1896). 이 사이 일본이 실권을 행사했다.

일본은 내정개혁을 요구하며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 개화파의 친일정부를 세워 일본식 ‘국정개혁’을 단행했다. 이후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토지측량과 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일본은 조사 과정에서 조선인의 성씨와 이름이 제대로 붙여진 것이 없다는 데 놀랐다. 물론 양반층이 아니라 중인 이하 하층민이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노비 제도가 일반화됐고, 하층민 등 노비 인구가 50%를 넘었다. 역사학자 중에는 70%가 넘는다고 보는 이도 있다. 양반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하층민이었다고 보는 견해다.

그런데 이들의 성씨와 이름이 거의 없다. 마당쇠, 쇠돌이, 먹보, 영바우, 이쁜이, 갓난이, 고만녜, 언년이, 막둥이, 또치 등등이 그것이다. 성격과 생김새, 출신 성분을 토속적으로 붙여 호명했다.

이는 마치 인디언 이름의 유래와 비슷하다. 즉, 두렵고 두려운 산짐승인 늑대와 함께 춤을 추는 용감한 남자가 있으면, 그를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사람을 ‘송어를 잘 잡는 강가의 친구’, 여기저기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을 ‘풍파를 몰고 다니는 사람’, 야성적이고 거친 사람을 ‘바람의 사나이’라고 지은 것과 같다.


'근본 없는 놈', 그 시초는?


우리는 옛날 머릿수만 있었을 뿐, 호명의 개념이 희박했다. 그러니까 세금 매길 때 머릿수로 매기는 것이지, 특정 이름으로 구분 지어 매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갑오경장과 함께 성씨를 갖게 되자 사람들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원하는 성씨를 선택했다. 노비의 경우는 대개 주인의 성을 따랐다고 한다. 김·이·박 씨가 많은 것도 그들의 노비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따라서 노비들이 가능한 한 남들이 우러르는 대성(大姓)을 따라 성씨를 정했기 때문에 대성받이가 되었다는 유래도 있다. 이에 따라 대성 명문들은 본의 아니게 그 인구가 배가된 셈이다.

천민은 족보를 산 경우도 많았다. 개인 능력만 있으면 성씨를 얻거나 바꾸고, 기왕이면 그럴듯한 성씨로 갈아탈 수 있었다.

김해김씨, 전주이씨, 경주최씨 등 대성일 경우 가짜가 많았다고 한다. 앞에서 거론한 이유에 곁들여, 문제를 일으켜 멀리 타관으로 도망가 살 때 기왕이면 양반 성을 따라 자기 신분을 위장하거나 세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하는 꼬락서니가 볼썽사나워서 '근본 없는 놈'이란 말도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근본 없는 놈'이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덕성과 품성이 망가진 인간, 망나니 같은 놈을 일컫지만, 혈통이 불분명한 사람도 가리킨다.

고루한 유생 출신인 필자의 부친도 생전에 “전주이씨 상놈은 있어도, 함평이씨(필자의 본관) 상놈은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기록에서 본 것이지만, 족보도 위조가 70%나 된다고 했다. 대저 12대 이상 올라가면 한두 번은 대가 끊기거나 조상의 계보가 불분명한 경우가 있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누구의 몇 대손이고, 가문이 어떻고 하는 의미를 퇴색시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필자의 부친도 11대 조에서 12대조까지 대가 끊겨 족보상 불확실한 면이 있다고 머리를 갸우뚱하신 적이 있다. 이를 사실로 인정한다면 필자 역시 '근본 없는 놈'이 될 수 있다.

하긴 옛날에는 기록물보다는 구전(口傳) 중심이고, 족보에 올려야 하는데 개인의 능력 유무, 혈족에 대한 열정의 유무에 따라 포함되거나 누락될 수 있고, 또 교통 통신이 여의치 못해 본의 아니게 족보에서 빠지는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5대 이상 넘어가면 제사도 안 지내는데 수백 년 전의 조상과 성씨를 따져서 뭐 하겠는가마는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뿌리 깊은 성씨 문화 속 일제의 이간책


우리가 알다시피 한국의 성씨는 부계(父系) 혈통만을 중시했다. 그래서 남성 중심, 가부장적 윤리관이 정착됐다. 하지만 현대 들어 부부 이혼과 심지어 3혼까지도 있고, 미혼모, 입양과 외국인의 입적, 다문화가족 등 복잡한 가족관으로 인해 혈통 의식이 거의 해체됐다. 이웃사촌이나 종교집단, 학연 등에 따른 관계가 혈통 사촌보다 더 가까운 시대가 됐다.

같은 혈통이라도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없거나 사는 환경, 교육 수준에 따라 남남처럼 지내는 경우가 많으니 혈통의 해체는 가속화됐다고 봐야 한다.

어쨌든 천민이란 양인 밑의 신분, 즉 상놈 등의 신분을 말하며 실제로 이들은 성씨가 없었고, 과거 응시마저 불가능했다. 여기에 편견으로 특정 성씨를 폄하하는 풍습도 있었다.

편견의 한 성씨인 지 씨를 보자. 지 씨는 고려 때 수상급(平章事)만 해도 36명을 배출한 왕 씨 못지않은 명문거족이었다. 그런데 조선조에 들어와 10여 명의 문과 급제자만 배출했다. 고려 때에 수상급 36명을 배출한 거족 가문이 왜 조선조에는 10명 대의 급제자만 나왔을까?

반란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지씨 가문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대의 상류 기득권층을 형성한 지 씨 거족이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데 대한 반발이 크고, 저항도 심했다. 그래서 고려 건국의 왕 씨를 도륙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 씨도 이성계 일족에 의해 대대적으로 숙청을 당했다. 숙청의 정당화를 위해 엄청난 음해와 모함을 유포시켰을 것은 당연하다.

이 밖에도 특정 성씨를 천시하는 경우를 본다. 가장 큰 이유는 양반층의 편견과 차별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백여 년의 근현대에 들어서는 일제 강점기의 이간책 때문이었다.

일제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근거 없는 편견을 유포해 주민 간에 분열시켰다. 일부 유식한 듯한 몰지각한 식자층이 여기에 가세해 특정 성씨를 비방하며 권위와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것이 오늘까지 통설로 잘못 인식된 것이다.

민족의 단결을 해치려는 술책과 이간책의 하나로 지어낸 말들을 우리는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은 특정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다른 분야로까지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정보통신이 발달한 것을 무기로 무조건 질러놓고 보자는 흑색선전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남북 분열, 지역 대결, 색깔론이다. 이른바 70년을 받쳐온 통치 프레임이다. 굳이 말하면 이건 이념 대결도 아니고, 가치 대결도 아니다. 단지 천박한 이익 세력으로 진영을 짜 증오와 저주를 퍼붓는 분열책이다. 이것이 지속되면 먼 훗날 하나의 통설로 자리 잡을지 모른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이런 국민 파편화의 폐습을 개선해야 한다. 편견과 차별을 가지고 사는 것이 얼마나 국민의식을 앙상하게 형해화시키는가를 성찰해야 한다. 그런데 언론이 파편화와 분열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다. 이익 중심의 세계관 때문일까.

미래의 가치 중심으로 사물을 보는 역사성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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