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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축천과 안톤 체홉의 ‘벚꽃 동산‘이 던지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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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축천과 안톤 체홉의 ‘벚꽃 동산‘이 던지는 메시지  
  • 이계홍
  • 승인 2021.04.03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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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시선] 변화하는 시대, 능동적 대응 없이 새로운 시대는 없다
낡은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 틀을 만들어가는 개혁의 페달, 굽힘없이 밟아야
기하학적인 조형성의 정부세종청사와 벚꽃이 어우러져 독특한 정취를 자아낸다. ©정은진 기자
기하학적인 조형성의 정부세종청사와 벚꽃이 어우러져 독특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는 방축천 ©정은진 기자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벚꽃이 한창이다. 만개한 벚꽃을 보노라면 봄의 활력과 환희를 느끼게 된다. 

도담동 세종충남대병원에서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법제처·소청심사위원회에 이르는 약 1.5km의 방축천은 문자 그대로 ‘벚꽃 동산’이다.

벚꽃 터널을 이룰 정도로 천변은 순박하고 풍성한 벚꽃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벚꽃의 자태를 보노라면 생활 속에 찌든 찌꺼기들이 말끔히 씻겨져 나가는 정화의 순간을 맞이하는 느낌이다. 

벚꽃의 만개 시간이 짧아서 쉽게 질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필자는 이 길로 출퇴근하면서 젊었을 적 본 안톤 체홉의 희곡 ‘벚꽃 동산’을 떠올려보았다.

이 작품은 매년 서울 동숭동의 연극무대에 올랐다. 제목이 말해주는대로 낭만과 사랑이 넘쳐나는 연극으로 알았지만,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상당히 사회성을 지닌 연극이다. 러시아 작품이 그러하듯 서사구조를 가지고 사회 모순과 극복 과정들을 그려낸다. 

‘벚꽃 동산’은 사회적으로 몰락해가는 지주의 현실을 그렸다.

19세기 말 러시아에 불어닥친 서방세계의 자본주의 바람과 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지주 계급의 몰락. 즉, 변화하는 시대상황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19세기 말 러시아 귀족들의 안이한 삶을 그린 것이다.   

안톤 체홉이 활동하던 때는 실증주의와 유물론이 소개되고, 볼세비키 혁명을 잉태하던 시기였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고리키 등과 함께 활동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치열한 반제정(反帝政) 투쟁을 벌이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체홉은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갖고 유형지인 극동의 사할린섬으로 가기도 한다.

이때 겪은 체험을 그린 ‘사할린섬’은 당시 러시아 사회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톨스토이즘이나 금욕적이고 계몽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사회모순의 고뇌와 인간성 해방에 시선을 돌렸다.

‘벚꽃 동산’은 이런 맥락과 닿아있다.

거대한 영지를 갖고 있는 과부 귀부인이 5년 동안 비워두었던 영지로 딸들과 함께 돌아온다. 파리에서 실컷 놀다왔으니 아름다운 영지는 퇴락하고, 농노들도 빈둥거리며 놀기만 한다. 현실에 안주하며 살았으니 영지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이미 늦었다.

해결하는 방법은 영지를 팔아치우는 일이다. 이때 한 대학생이 찾아와 귀부인의 딸을 꼬드겨 사랑에 빠진다. 청년은 딸에게 “낡은 집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자”고 권유한다. 

몰락했지만 이미 기득권의 한 자락을 잡고 있는 소녀의 가족은 이를 쉽게 수용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 대책도 없으니 벚꽃 동산은 경매에 붙여지게 되고,  낙찰자는 장사로 신흥재벌이 된 농노 출신의 이웃 남자였다. 

결국 가족들은 파리로, 모스크바로 길을 떠난다. 낡은 영지를 떠나 제각기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사방으로 흩어져 간다. 그들이 떠난 뒤에는 낡은 지붕과 수백년 묵은 벚나무를 찍어내는 도끼 소리가 대지에 메아리칠 뿐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스토리는 소박하지만 당시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러시아의 지주 계급이 패배하는 모습으로 정든 땅을 떠나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지 않고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없다는 가르침. 이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다. 

지금 기득권 카르텔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보수 세력들이다. 사사건건 개혁을 냉소한다. 전통적으로 보수는 품격과 포용과 아량의 멘탈리티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는 이상하게 잔혹하고 거칠고 부박하다. 

오늘날 개혁의 주체인 양 외치면서도 정작 판판이 깨지는 무기력한 진보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수가 더 분열과 이간질과 대립과 갈등을 부추긴다.

가치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익 중심으로 사물을 보는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방축천의 ‘벚꽃 동산’을 거닐면서도 마음은 편치 못하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그래도 조금씩 세상을 바꿔간다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세상 만물은 고정 아닌 것이 원칙이다.

기득권에 안주하기보다 부단히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이유다.

4월 7일의 재보선 결과에 상관없이 낡은 유제(遺制)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 틀을 만들기 위해 굽힘없이 개혁의 페달을 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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