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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개혁과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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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개혁과 총선 
  • 이계홍 주필
  • 승인 2020.03.2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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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시선] 26대 루즈벨트, 언론 백업 힘입어 ‘재벌‧노동개혁’ 드라이브 
32대 루즈벨트 ‘평화‧공존 가치’, 언론 부재로 냉전시대 도래 
4.15총선 개혁, 기대 불가능한 언론… 깨어있는 국민 역할 기대 
미국의 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좌), 32대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우). 모두 개혁적 인사들이다. (발췌=네이버 지식백과)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미국에는 루즈벨트라는 이름의 두 대통령이 있다. 한 사람은 26대 대통령 공화당 소속 시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민주당 소속 32대 대통령 프랭크린 루즈벨트( 1882-1945)다. 두 사람은 먼 일가붙이이기도 하다.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미국 사우스 다코다주의 러시모어 산꼭대기 바위산에 새겨진 커다란 네 명의 얼굴 조각상(흔히 ‘큰바위 얼굴’이라고 한다) 중 한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그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독립선언문을 기안한 토머스 제퍼슨, 노예 제도를 폐지한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미국 국민의 추앙을 받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보수주의자지만 진보가 지향하는 재벌 개혁과 함께 노동자의 편에 섰으며, 미국의 국립공원을 종전보다 5배나 넓힌 환경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32대 대통령 프랭크린 루즈벨트는 미국 유일의 4선(1933-1945) 대통령으로 뉴딜정책으로 미국을 부흥시킨 주인공이며, 일본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에서 승리로 이끈 영도자다. 

√ 한국과 인연이 깊은 ‘두 대통령’ 

두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형뻘인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는 데 기여한 카스라(일본의 외교특사)-테프트(미국의 외교특사) 밀약을 승인한 대통령이다. 대한제국을 일본에 한반도 통치권을 양해한 제국주의 팽창주의자인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부패하고 무능하고, 서세동점(西勢東占)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한 은둔국으로서 국가능력이 부족해 멸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더라도 미국의 대통령이 자기 땅도 아닌 한반도를 일본에게 식민지로 양여한다는 각서를 써준 오만을 부렸다. 

카스라-테프트 밀약이란 일본이 한반도를 집어먹는 것을 미국이 양해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두는 것을 양해한다는 협약이다. 제국주의 침탈의 야욕을 서로 나눠가진 음험한 약정이다. 

동생뻘인 민주당 소속 프랭크린 루즈벨트는 1945년 일본을 격파해 한반도를 일본 식민지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 그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를 30년 식민통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 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 이야기 

두 대통령 중 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 이야기부터 해보자.

시어도어는 그 자신 부호 출신이면서 철저하게 재벌개혁적이고, 친노동적이며, 친환경운동에 앞장선 대통령이었다. 점증해가는 ‘재벌독재’ 또는 ‘강도귀족’과 싸운 친노동 반재벌 운동가였다. 동시에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를 넘어 우생학을 신봉하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시어도어는 19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의 재선 런닝메이트로 선택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부통령은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대통령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 후보자는 상대적으로 덜 위협적인 사람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기반 또한 취약한 무색무취한 인물이 부통령에 선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행운을 따르게 한 것도 부통령 직이다. 매킨리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암살되고 말았다. 헌법 규정에 따라 시어도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받는 행운을 안았다. 

그는 1963년 존 F 케네디가 암살되자 ‘텍사스의 핫바지’라는 린든 B 존슨이 대통령 직을 승계(36대)한 경우와 같다. 

포드 부통령은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직전 사임하자 대통령직을 승계(38대)했으나 이들 모두 한결같이 똑똑한 인물이란 평을 듣지 못했다. 이렇게 부통령은 전통적으로 사람은 좋으나 유능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 부통령인 그가 대통령직 승계, 반전의 연속 

그런데 대통령 직을 물려받은 시어도어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42세)으로서 과감하게 개혁정책을 폈다(그는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아니어서 일반적으로 최연소 대통령은 43세에 취임한 존 F 케네디로 명명된다). 시어도어는 무능하리라던 종전의 부통령 캐릭터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위에서 보듯이 정치적 기반이 별로 없는 그가 미국 기득권의 상징인 재벌 개혁에 나선 것은 젊은 나이가 주는 패기 때문이었다. 친재벌적인 공화당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굽힘없이 재벌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   

당시 재계에는 철강왕 카네기, 석유재벌 록펠러, 금융재벌 JP모건, 철도 재벌 굴드가 미국 경제를 주도하고 있었다. 시어도어 혈통 역시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이래 19세기 초부터 무역업과 금융업으로 재벌급에 드는 가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벌 개혁에 앞장섰다. 보수당인 공화당 소속이면서도 민주당 소속 우드로 윌슨(28대 대통령)과 함께 정파를 초월해 사회혁신 운동을 폈다. 실권 없는 부통령직에 그를 앉힌 것은 공화당내 보수파 원로들의 정략이었는데, 그는 대통령이 되자 용기있게 반공화당 정책을 폈다.   

공화당 강경파들은 “무식한 카우보이를 데려다 놓았더니 손을 물렸다!”고 아우성쳤다. 그는 아내와 어머니가 장티푸스에 걸려 동시에 죽자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자식들을 숙모에게 맡긴 뒤 서부로 가서 수년동안 카우보이로 살았는데, 공화당 원로들은 무파벌이라 하여 그를 데려다 조종할 계획이었으나 오히려 물려버렸다고 이를 빗대 비난한 것이었다. 

카우보이 생활이 그에게 노동자 계급의 고충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우보이 생활의 실천 현장에서 ‘노동운동가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시어도어는 거대화된 대기업을 통제하기 위해 ‘셔먼 반독점법’을 제정해 재벌의 인수합병을 막아 대기업을 통제했다. 

이때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 모건의 노던 시큐리티스 등 대기업들이 타격을 입었다. 기업들의 독점 합병을 '트러스트(Trust)'라고 불렀는데, 이 독점금지법으로 대기업에 타격을 입힘으로써 그는 '트러스트 파괴자(Trust Buster)'라는 악명을 얻었다. 

미국의 경제정책은 그때까지 시장 불간섭주의를 고수했으나, 그의 이러한 정책으로 자유방임시장에 정부가 통제, 감독하는 전환점이 구축되었다.

그가 이렇게 반독점 정책과 함께 반기업, 친노동자 정책을 펼쳤다고 해서 꼭 노동자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기업에게 강하게 나갔던 것만큼 노조의 노동쟁의에도 강경하게 대응했다. 

공익과 사회안정을 명분으로 노동 쟁의에 개입했고, 필요하다면 '총칼 정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최대한의 입법 조치를 실천했다. 그것은 배운 사람으로서의 사회공동체적 책무의식이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 저항 만난 노동개혁, ‘언론의 전폭적 지원’

이런 노동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은 당시 언론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반대세력이 도처에 깔렸지만 언론의 지원 때문에 돌파해나간 것이다. 우리의 현실과는 사뭇 다르다.

1900년대 초 미국의 공업 총생산액은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액수를 넘어서면서 19세기 영국을 대신해 세계의 패권국가로 등장했다. 이때 세계 공산품의 절반은 미국제였으며, 면화 철 석유 등의 중요 1차 생산물 생산량 역시 세계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유례없는 경제성장은 거대 기업들의 성장을 함께 불러왔다. 석유업의 록펠러, 철강업의 카네기, 금융업의 모건, 철도업의 밴더빌트와 굴드 등이다. 이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면서 미국의 힘이자, 세계를 쥐어흔드는 주인공이 되었다. 

소득세도 없고, 독점제한법도 없고, 노동3권도 보장되지 않았으니 부자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노동자, 서민, 중소기업 등 소외계층 양산과 불평등 구조를 불러왔다. 사회적 분배라는 것이 록펠러나 카네기 등 자본가의 자선사업에 의존했으나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복지는 재벌의 선행으로 포장될 뿐, 서민대중에게 불평등구조를 해소하는 방편은 되지 못했다. 

재벌이 약육강식의 안하무인과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온갖 법적 혜택과 특권 반칙 가운데서 포악한 ‘강도 귀족’이 되어갔다. 무분별한 개발에 따른 환경파괴 역시 피해는 그 언저리에 사는 빈민층에게 돌아갔다. 

미국의 과제는 경제성장의 그늘인 경제력집중과 빈부격차, 환경파괴로 나타났다. 이의 해결을 위해 시어도어가 젊은 패기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재벌기업과 보수 정치인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견제와 방해와 감시가 집중되었다. 자기 당 소속 공화당 의원들의 공격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막강한 재벌의 자금력과 보수 공화당이 연대해 공격해옴으로써 그의 개혁은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너 역시 재벌 돈을 받아먹은 썩은 정치인”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워싱턴에서 재벌의 검은 돈을 받지 않은 정치인이 없었듯이,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어도어는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더욱 강력하게 재벌 규제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때 강철왕 헨리 프릭은 “우리가 저 개새끼에게 먹이를 주었는데, 저 놈은 우리 손을 무는구먼!”하고 비난했다.  

도처에 적이었으니 점차 재벌개혁의 동력을 상실해갔다. 참모들이 돈의 유혹을 받고 떠나가고, 측근들도 지친 나머지 무너지거나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원군이 나타났다. 바로 언론이었다. 당시 언론은 선정성으로 장사를 해먹는, 이른바 사회적 추문을 들춰내 지가를 올렸는데, 그 가십 대상은 재벌들이었다. 

언론은 재벌들이 유명 여배우와 스캔들을 일으키고, 상류사회에서 타락하고 부패한 짓을 저지른 행태들을 까발렸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기자+쓰레기‘라는 합성어인 ’기레기‘라고 부르고 있듯이, 당시 재벌들은 이들을 가리켜 “거름더미 뒤지는 새끼들(muckraker)”이라고 조롱했다. 물론 비하에 대한 용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이들이 재벌들의 일탈과 비행과 치부를 파헤쳐 퍼뜨림으로써 재벌들은 이를 갈았지만, 국민들에게는 후련한 보복심을 안겨주었다. 

이러니 재벌에 대한 국민 여론이 악화되었는데,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재벌개혁의 동력을 얻어 밀어붙인 것이다.   

시사지 <맥클루어>지 아이다 타벨 기자는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를 시리즈로 탐사보도하며 록펠러가 어떻게 어마어마한 부를 이룩했고, 그 이면에 얼마나 많은 추악함과 잔인함이 있었는지 속속들이 파헤침으로써 국민의 공감을 샀다. 

업튼 싱클레어 기자의 ‘정글’ 역시 식육업체들의 비리와 비위생적인 정육 과정을 고발했다.  

여기에 정론의 가치에 충실한 언론들이 가세했다. 부패 정치와 부패 기업에 대한 고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헌신의 정신, 미국 헌법적 가치에 충실한 인권 옹호의 보도, 나쁜 권력에 대한 감시와 독식구조에 천착하는 재벌의 악습과 비행에 대한 비판을 무게감있게 가해 시어도어의 개혁정책을 고무시켰다.

이에 힘입어 시어도어는 재벌의 리베이트 관행을 저지하는 엘킨스법(1903), 철도회사 운임의 독점적 형성을 막는 헵번법(1906), 식육업체를 비롯한 식품재벌들의 비리를 차단하는 육류검사법 및 식품의약규제법(1906) 등을 입법화했다. 무연탄 광산의 파업에 개입해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재벌을 굴복시켜나갔다.  

재벌과의 싸움은 시어도어 행정부의 확고한 의지에서 출발했으나, 재벌들의 부패상과 추악한 거래를 고발하고, 정경유착을 비판하고, 기업가 정신을 정립하도록 한 언론의 지원이 없었으면 성공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 이후 미국 사회에서 대기업이 탈세하고, 기업끼리 담합하고, 매점매석하고, 가짜를 생산하는 따위의 비리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것은 기업 파산뿐만 아니라 그 인생에 종언을 고하는 범죄가 되기 때문에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되었다. 

그 힘은 시어도어 때문이었지만, 언론의 백업의 힘이 컸다는 것은 미국 언론사가 말해준다.

시어도어는 환경보호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것도 대기업 집단의 무분별한 공장 건설을 막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그는 크레이터 국립공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국립공원 수를 종전보다 3배로 늘렸으며, 루이지애나 주의 펠리컨 섬을 미국 최초의 조류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총 51개의 자연보호구역을 지정했다. 

이렇게 해서 공원 구역은 그의 집권 이전보다 5배 이상 늘어났다. 오늘날 미국이 자연생태공원 천국으로 명명된 기반이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 32대 루즈벨트 대통령, ‘인류 평화와 공존’ 꿈꾸다 

32대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요즘 식으로 부르자면 빨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친소련파였다. 프랭크린이 1-2년만 더 살았더라면 세계 질서가 미소 냉전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고, 즉 대립하지 않고 상호 번영을 구가했을지 모른다는 가설도 있다. 그런데 그는 1945년 8.15 해방 넉달 전 4월 타계했다.

그는 세계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인류 평화와 공존을 꿈꾸었다. 그는 친서방과 함께 친소련 노선을 걸었다. 그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었다. 

그는 일본을 격퇴하기 위해 스탈린더러 만주와 한반도로 군대를 몰고 오라고 요청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이념의 지형에 있어선 냉전적 사고가 아니었다. 

그의 사후 처칠과 투르만, 스탈린이 대결과 대립 구도로 세계를 재편하면서 냉전이 강화되었다. 그 피해를 우리가 고스란히 받았다. 해방 공간에서 좌우익 대결로 산하를 핏물로 덮더니 6.25 동족상잔까지 가져왔다. 

√ 역사적으로 중요한 ‘언론의 역할’

2017년 5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양지고 학생들이 제작한 선거 독려 캠페인 영상 일부.
언론에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적다면, 깨어있는 국민들은 이번 총선에서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주길 기대해본다. 사진은 양지고 학생들이 제작한 투표 영상의 한 장면. 

이때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면? 물론 해방 공간에서 주체적 역량 부족이 분단의 반역사성을 가져왔다고 보지만, 시대적 통찰력을 외면하고 분열과 반목과 대결을 부추긴 언론이 분단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요즘 전염병 하나를 가지고도 정파적 이해로 분열하고 반목한다. 그중 언론이 중심에 선다. 이익 중심으로 사물을 보니 반대파를 부정하는 증오의 언어만이 남발된다. 반대파를 어깃장 놓고, 존재하지도 않는 이념 싸움을 부추긴다. 

거기에 정치인이 들어와 대결의 칼춤을 추도록 스테이지를 제공한다. 

미국의 두 루즈벨트 대통령을 바라보기 바란다. 두 사람은 정파적 이해나 이념에 상관없이 정의와 공정과 평등이라는 인류의 보편 가치를 위해 충실히 복무했다. 남의 나라 대통령이지만 존경스럽다. 

지금 코로나19가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만, 4.15 총선 또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단군 이래 가장 중요한 시대적 변곡점이 되는 선거가 아닌가 싶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지도자 선구안이 절실한 때다. 이를 위해 언론이 가치 중심의 제 역할을 다해야 하는데 너무 오염되었다. 깨어있는 국민이 역사적 전환점에 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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