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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향한 집단 광기와 선동, 언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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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향한 집단 광기와 선동, 언론은
  • 이계홍
  • 승인 2019.10.1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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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시선] 언론이 바로 서야 국민 뜻에 부합하는 개혁 가능(1편)  

 

지난 8일 검찰 개혁 브리핑을 하고 있는 조국 법무부장관. (발췌=법무부)
지난 8일 검찰 개혁 브리핑을 하고 있는 조국 법무부장관. (발췌=법무부)

 

“주여, 저들은 모르나이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다.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나설 때에는 사람들은 벌써 선동되어 있다 -괴벨스 

 

히틀러의 오른팔이자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의 말이다. 오늘의 세태를 보고 떠오르는 레토릭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구경나온 유대인들이 그를 조롱하며 돌팔매질을 했다. 2000여년 전 유대인들은 “거렁뱅이같은 젊은 놈이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 민중의 왕이라고 떠벌이고 다니며 아픈 자, 낮은 자, 가난한 자의 해결사라고 사기치고 다니고 있다”고 죽이라고 비난한다. 

 

정신병자 같은 청년을 벌을 준다는 것이 마땅찮았던 빌라도 총독은 귀찮다고 내버려두었으나 군중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못해 도장을 찍어서 그는 십자가 처형을 받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간다.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진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자칭 왕이라고 씌운 가시 면류관을 막대기로 치며 야유한다. “지까짓 게 민중의 왕이란다! 에라 이 미친 새끼!”. 그를 핍박했던 사람은 빌라도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선동된 민중들이 단죄한 것이다. 이때 예수는 이렇게 읊조린다.

 

-주여, 저들은 모르나이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그는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민중들이 낮은 자, 소외된 자의 편에 서있었던 그의 정신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천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낮은 사람들의 편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여 저들은 모르나이다”의 의미를 알게 되기까지 너무도 많은 시간과 비싼 대가를 치렀다.     

#. 우중정치 선동자는 바로 언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어떤 집단 광기를 본다. 누군가의 ‘선동적 주술‘에 세뇌되어 예수에게 돌을 던진 당시의 유대인과 다르지 않은 풍경들이다. 

일방적 정보의 주입에 민중은 저도 모르게 증오와 저주의 화살을 날리며 “죽이라!”고 외친다.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편 갈라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에게 휘둘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최근 ’조국 사태‘를 보고 느낀 감정이다. 

이런 ‘우중정치(愚衆政治)’ ‘폭민정치’의 선동자는 바로 언론이다. 

대중 조작적 선동은 예수 시절이나 지금이나 진실을 감추는 ‘흉기’가 되었다. 우리는 사실(fact)과 진실(truth), 또는 본질(quiddity)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포르노냐 성화(聖畫)냐, 이면에 담긴 진실 

필자가 신문방송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문기사 작성법’을 강의할 때, 늘 사례로 드는 것이 있다. ‘푸에르토리코의 성화(聖畵)’ 이야기다. 푸에르토리코 국립미술관 중앙홀 벽면에 크게 걸려있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이 그림은 불미스럽게도 아랫도리만 천으로 가린 맨몸의 늙은이가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다. 

얼핏 보면 무슨 포르노 그림 같기도 하고, 주책없는 늙은이가 젊은 여인을 탐하는 음화처럼 비치기도 한다. 권위있고 신성한 국립미술관 로비에 왜 이따위 그림이 걸려있지?

그러나 그림 속의 늙은이는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애국지사다. 압제자는 그를 체포해 감옥에 넣고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굶어죽기 직전이다. 가족들 모두 쫓기고 있으니 그를 보살필 사람도 없다. 

집에 홀로 남은 며느리(혹은 딸)가 그의 최후를 앞두고 마지막 면회를 갔다. 음식물 반입은 애당초 안되기 때문에 그녀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숨이 넘어가는 그에게 젖을 물리는 일밖에 없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며느리의 젖을 처절하게 빠는 시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푸에르토리코 독립 영웅의 초상인 것이다. 

팩트로 보면 그림의 노인과 젊은 여자는 격에 어울리지 않게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의 본질, 또는 진실을 파보면 며느리(혹은 딸)가 시아버지에게 보내는 마지막 애틋한 효도와 존경, 안타까운 생명에 대한 외경이다.   

#. ‘조국 법무부장관’을 향한 집단 광기  

신문 기사란 팩트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담겨있는 진실을 캐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취지에서 필자는 곧잘 이 성화를 인용한다. 있는 그대로를 놓고 보면 그것은 틀림없는 포르노 음화다. 그러나 이면을 살펴보니 거룩하고 성스러운 애국자의 마지막 생의 슬픈 서사가 담겨있다.

현란한 정치적 선동이 남발되고, 그것을 어떤 의도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정치세력과 언론 때문에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세상이다. 그 방면에 무지하거나 생각이 짧다 보니 민중은 거기에 쉽게 선동된다. 

한참 뒤 돌아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탄식하지만, 이미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한 뒤다. 조국 법무부 장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백만 건이 넘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면서 대중은 어느새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저놈 죽여라!”하고.       

#. 스펙 좋은 ‘조국’은 공격의 호재

조국 법무장관은 얼핏 보면 스펙 좋고, 명문대 출신에, 재력까지 갖춘 이른바 강남 특권층의 한 부류이다. 그런 그가 학연 따위의 연줄과 자본력을 동원해 자녀를 편법으로 좋은 대학에 입학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를 두고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이 연일 그의 부도덕성과  ‘불법성’을 난타했다. 

조국은 기득권 세력의 먹잇감으로는 호재다. 개혁적 레토릭을 쏟아내왔지만 까보니 자녀 편법 입학 혐의가 있고, 재산도 있다. 그런 사람이 진보를 자처하며 개혁을 얘기하니 ‘이중인격자’거나 ‘위선자’라고 몰아붙이기 딱 좋은 것이다.

당시의 대입 제도가 표창장, 외국어, 봉사활동 등 여러모로 확보하기가 용이한 가진 집안이나, 스펙 좋은 부모의 자녀에게 유리하게 편성되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조국 또한 그 범주에 속해 그런 제도를 십분 활용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자식 교육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조국과 같은 스펙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부모의 상실감과 분노는 크다. 언론은 그 지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조국 아들 딸의 표창장, 해당 중·고교와 대학, 조국 아버지가 운영했던 학교, 사모펀드, 조국의 부인은 물론 동생과 이혼한 동생의 전처, 오촌 조카, 사모펀드 관련자 등등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파헤친 보도가 100만건 이상 쏟아졌다고 했다. 

그 정도라면 어떤 누구도 ‘부도덕의 금치산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당연히 쏟아지는 보도의 홍수에 단순소박한 국민들은 선동되고 세뇌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문재인 정부를 싫어하는 세력은 더욱 신명이 나서 펌프질을 했을 것이다. 

#. ‘조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신문과 방송 기사 이면에 담긴 진실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집단 광기에 휘둘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피지 않으면 신문을 제대로 읽는다고 말할 수 없다. 

검찰과 보수언론이 ‘동맹군’이 되어 조국을 패는 사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아이 고교시절의 표창장 하나 가지고 검찰 특수부가 총동원되다시피 할 만한 사건이냐, 학생 하나 잡자고 실력있는 검찰력을 총출동시킬 수 있느냐. 왜 개패듯이 해? 이건 좀 이상한데? 

조국 딸 수사하듯 문제가 있다는 다른 공직자도 동일한 잣대, 동일한 절차, 동일한 강도로 수사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면 공정하고 공평한 수사라고 할 수 있나. 결국 편파적이고 이중잣대로 수사하는 게 아니냐 라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법과 원칙을 동일한 잣대로 준수해야 하는데 조국에 대해서만 유독 가혹하다. 법을 다루는 법무장관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의 전부일까? 

법 앞에서 누구나 차별없는 수사를 받아야 하는데, 누구는 샅샅이 뒤지고, 누구는 봐주기 수사를 한다. 표적수사, 먼지털이식 수사와 보도가 정치적 복선이 깔려있다고 보는 이유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조국 사태를 보고 대중들은 더욱 언론의 편파 왜곡과 음험한 대중조작적 제작 태도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는 기능을 편파적이고 불공정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인식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이중 조중동과 종합편성 3사가 주도적으로 ‘특종’ ‘단독’이라는 이름으로 집중포화를 날리고 있다. 

검찰이 흘리고, 보수언론이 받아쓰고, 때로는 더 의혹을 키우고, 이를 보수야당이 확대재생산한다. 철저한 카르텔 시스템이다. 그것이 벌써 두달째다. 그래서 “검찰개혁”과 “언론개혁” 요구가 터져나왔다. 

#. 조국발 개혁, 저항하는 검찰 카르텔 

지난 7월 25일 대검찰청 15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43대 윤석열 검찰총장 취임식. (제공=대검찰청)
지난 7월 25일 대검찰청 15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43대 윤석열 검찰총장 취임식. (제공=대검찰청)

보수세력은 왜 하필이면 조국이냐고, 조국이 아니어도 검찰개혁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국민이 이에 동의한다. 필자 역시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너무 단순무식한 생각이다.  

30여명의 특수부 검사 인력을 투입하여 장관 후보자 하나를 턴 이유가 무엇일까. 저 정도라면 갓 태어난 아이도 걸려들 것이라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다. 장관 한 명을 낙마시키기 위해 수십 명의 특수부 검사를 투입하고, 70여 곳을 압수 수색한 숨은 의도는 분명히 있다.   

청와대는 경찰 국정원 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일정 부분 개혁했다. 검찰 역시 컨트롤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엘리트 조직이라고 하는 검찰은 민주화 이후 법적 제도적으로 경찰 국정원 국세청 감사원 등 기관을 합친 막강 권력기구로 등장했다. 내부적으로 상명하복의 문화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고, 밖으로는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해왔다. 

그런데 불행히도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조직문화가 형성되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사회적 풍자에서만이 아니라, 민주적 절차에 충실한 ‘고졸’ 출신의 노무현을 헌 신짝 취급한 지난 역사에서 그것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은 체질적으로 권위주의 정권 세력에 가깝다. 민주화를 탄압하고, 독재에 부역했던 과거에서 보듯이 생리적·정서적으로 구집권 세력, 보수언론, 구관료 집단과 동맹을 맺는 구조다. 

그러니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개혁을 말하는 데도 잘 움직이지 않는다. 개혁은 기득권 세력들이 그들의 고유 영역을 침해받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2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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