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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이 된 ‘김종서’, 부활의 날개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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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이 된 ‘김종서’, 부활의 날개짓
  • 이계홍
  • 승인 2019.10.01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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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역사, 재조명 절실… 절재로와 장군면 묘역 성역화 이어 역사 테마공원 조성 박차
김종서 장군 제향 봉행 모습.
김종서 장군 제향 봉행 모습.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김종서 장군은 조선시대 세종대왕과 문종의 총애를 받은 명장이다. 

계유정난이 그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수양대군의 권력욕에 의해 가문 전체가 한 순간에 역적이 됐다. 

그래서 김종서 장군의 재조명은 절실하다. 다행히 세종시에서 영혼이 되살아나 부활의 날개 짓을 하고 있다. 

# 세종ᐧ문종의 총애를 받은 명장

김종서 장군은 무인으로 알고 있지만 본래 문신으로서 당대의 최고위급 조정 중신이었다. 정몽주 신숙주 정인지 황희 한명회 등과 함께 정사를 이끌었는데, 이조정랑, 함경도 도절제사, 형조판서,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 또한 고려 말과 조선조 초기 도통제를 지낸 명장이자 명신인 김수다. 

김종서는 세종대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지만,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의 각별한 신임이 두터웠다. 품격과 학문이 높고, 정사를 올바로 이끌었기 때문에 문종 또한 김종서를 어버이처럼 여겼다고 한다. 

세종의 장남 문종은 본래 병약한 임금이었다. 재위 2년 만에 병사했는데 그는 죽음을 앞두고 좌의정 김종서를 어전으로 불러들였다. 

“과인이 고약한 병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래도 이승을 떠날 것 같소. 저 어린 세자를 두고 떠나려니 눈이 감겨지지 않소. 나의 신임하는 좌의정 김종서 공이 영의정 황보인과 함께 아들을 잘 보살펴 대통을 잇게 해주시오.”

유언을 남기고 문종은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 단종이 뒤를 이었다. 그때 단종의 나이 12세였다. 단종이 이렇듯 나이가 어린지라 아비 문종은 70세의 원로 김종서에게 간곡히 아들을 부탁했으리라.

# ‘수양대군과 계유정난’의 희생자

단종이 즉위하자 문종의 유언대로 고명대신(국왕의 임종 시 유언을 받드는 정승, 판서, 또는 그 직을 역임한 원임 대신. 섭정승이라고도 함)인 김종서와 황보인, 정분이 단종을 보위했다. 

이때 야심을 품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바로 아래 동생인 수양대군이 부하 장사들을 동원해 역성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것이 계유정난(1453년)이다.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주도적으로 정국을 이끌자 김종서를 살해 0순위로 지목했다. 다른 신하들은 문약(文弱)으로서 몸이 골골하지만 김종서는 몸이 단단한데다 무예가 뛰어나고, 성격 또한 강단 있고 곧기 때문에 그만 제거하면 쿠데타는 성공한다고 본 것이다.   

10월 10일 김종서의 집을 찾은 수양대군은 "왕실의 혼인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며 정중히 단자를 내밀어 읽도록 한다. 

물정 모른 김종서가 등불에 비춰 단자를 읽자 수양대군이 눈치를 주자 수행 장사인 임어을운이 뛰어들어 철퇴를 가해 김종서를 쓰러뜨렸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아들 김승규가 아버지를 몸으로 감쌌고, 둘째 김양규가 달려들어 저항했으나 그들 역시 철퇴를 맞고 현장에서 죽었다. 

강인한 체질인 김종서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둘째 며느리 친정으로 옮겨가 은신했는데 다시 찾아온 수양대군의 부하 양정, 이흥상에게 도끼로 난자당했다.

수양대군은 여세를 몰아 단종의 명이라고 중신회의를 소집한 뒤 살생부 계획에 따라 영의정 황보인을 죽이고,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을 귀양보냈다가 사사했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 김종서와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고 거짓으로 꾸며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사사했다. 

그리고 단종을 영월로 보내 금부도사로 하여금 단종의 목을 새끼줄로 묶어 문 밖에서 잡아당겨 죽였다. 이것이 계유정난이며,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한 출발점이다. 세종ᐧ문종ᐧ단종의 충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이중 김종서가 가장 용서 못할 역적으로 몰려서 고려사 편찬자 명단에서도 이름이 삭제되고 권력을 탐한 신하로 악덕 명명되었다. 그러나 승자의 기록인 이조실록에 김종서의 비리나 개인적 결점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든 흠을 잡아 일가족 몰살의 명분을 삼으려 했던 세조였으나 사초 기록엔 흠 하나 잡을 것없는 깨끗한 대신이란 것이 실록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는 영조 대에 마침내 복권이 되었다. 

# 김종서의 기상과 청렴, '장군제(將軍祭)'로 승화해야 

이런 김종서 장군 호를 딴 절재로가 정부세종청사 뒤편 길로 선정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력의 최정점에서도 올곧고 사심없이, 청렴하게 정사를 이끈 상징적 인물을 기리기 위해 절재로로 명명한 것이 결코 사사로운 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생전엔 권력의 정치적 음해와 모략으로 매도되었지만 사후에 오점 하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한 지도자의 양심적 삶을 되새기는 길이 생겼다는 것,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며, 자부심인가.     

수양대군 일파는 김종서 장군 시신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도륙해 버렸다고 한다. 그는 최영 장군의 업적에 못지않은데 우리에게 생각보다 덜 알려져 있다. 몰살당한 슬픈 가족사 때문에 그의 족적이 널리 선양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그때 그의 혈족 7명이 죽고, 부녀자들은 노예로 끌려 나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의 부친도 명장이었으나 삭탈관직이 되었다.

가족사가 몰락했지만 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무 겸장의 인물이란 점에서 세종시에서 그의 업적과 정신을 선양하는 사업을 펼칠 필요가 있다. 

추모제는 그의 본향 순천 김씨에 의해 매년 묘역에서 치러진다고 하는데 세종시 차원에서 보다 더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 정부세종청사가 있는 세종시에서 그를 기리는 것은 무엇보다 뜻이 깊을 것이다.   

지난해 묘역 성역화에 이어 2021년 역사테마공원이 ‘김종서의 기개와 충절 정신’을 대내외 만방에 올리는 기폭제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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