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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극한 직업, 감정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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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극한 직업, 감정노동
  • 박승권
  • 승인 2019.09.16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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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권의 백살까지 일하기] 노동자의 밝은 미소, 그 이면

필자는 종종 EBS ‘극한 직업’ 프로그램을 찾아보곤 한다. 나름 장기간 애청자다. 하지만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직업들이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서만 보여지는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간혹 경찰공무원, 응급구조대 종사자 등의 대면업무 고충을 담을 때도 있었지만, 필자는 한번도 ‘정신적 측면’의 고충에 중점을 둔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힘들다’는 인식이 육체적, 물리적인 측면으로만 더 공고히 자리잡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금은 종영한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는 수 년 전 ‘극한 알바’ 편을 통해 한 멤버에게 콜센터 텔레마케터의 고충을 느껴보게끔 했던 적이 있다. 무려 85번의 죄송하다는 말 끝에 단 한 번의 감사하다는 말을 듣게 됐는데, 이는 힘들다는 것이 육체적, 물리적인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됐다.

법적 의미의 ‘일(근로)’이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모두를 뜻한다. 하지만 힘든 일, 속된 말로 ‘빡센 일’이라 하면 우리는 으레 밤샘 철야작업, 고강도 육체노동, 혹한·혹서기 야외작업, 사고위험에 노출되는 작업 등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물론 일의 강도가 낮다는 뜻은 절대 아니지만, 누군가 필자에게 힘든 일이란 무엇인지 묻는 다면, ‘사람 상대하는 일’ 다시 말해, 고객을 응대하는 일, 혹은 ‘감정노동’을 반드시 포함해 말하고 싶다.

감정노동이란 것이 비단 콜센터 업무처럼 상담을 주로 하는 일에 국한되는 개념은 아니다. 감정노동은 기업의 재화나 서비스가 고객과 만나는 접점이라면 어디서든 발생한다. 직접 고객을 대면하는 마트, 백화점, 식당, 교통, 금융업, 사람을 돌봐야 하는 요양보호, 보육, 간호, 민원처리를 담당하는 행정청 직원, 사회복지사 등 우리나라 감정노동자는 전체 임금 노동자의 약 30~40%, 8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감정노동’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된 것은 30여 년 전이다. 하지만 그 역사는 훨씬 길다. ‘고객은 왕이다(The customer is king)', ‘고객은 언제나 옳다(The customer is always right)’와 같은 고객 우선주의 표현은 1900년대 초 미국과 영국에서 나타났지만,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서비스 경쟁력 향상, 고객만족 실현을 위한 기업의 철학문구 차원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고객서비스가 서비스산업의 눈부신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서비스 경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기업과 고객의 과도한 요구에 따라 노동자의 감정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상품화’되어 가는 것이 문제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우울감과 스트레스, 감정의 부조화 등을 겪고 있다.

최근까지도 감정노동에 따른 스트레스를 노동자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강했다. 개인의 감수성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은 그보다 직장 내 구조적, 조직적 문제가 작용하는 바가 매우 크다. 고객은 ‘갑’이고 노동자는 ‘을’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일하는 동안 어떠한 경우라도 기업이 요구하는 감정과 태도를 유지하라는 고객응대업무 매뉴얼, 고객을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감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드는 고객만족(CS)교육, 고객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좋게 좋게’ 가자는 식의 사후관리 조치 등이 감정노동자의 정신건강을 피폐하게 하고 있다.

5~6여 년 전 발생한 일명 ‘라면 상무’의 승무원 폭행사건이나 ‘땅콩회항’ 사건 등을 계기로 우리나라도 감정노동자의 권익보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매우 반가운 일이다. 최근 감정노동자를 보호하는 많은 법과 제도도 생겼다. 감정노동자의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 경우 사후 관리조치에 대한 의무가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된 것. 공공기관 등 일부 기관에 전화를 걸 때 연결통화음에 폭언을 하지 말아달라는 음성 안내가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법에 명시된 고객응대 노동자 보호의무 때문이다.

아울러, 올해부터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질병’이 산재 대상 질병으로 포함됐다. 대표적으로 우울증이나 적응장애가 이에 속한다.

하지만 법과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당사자들의 노력이다. 기업은 근시안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당장 눈앞의 경제적 가치(효율성)보다 사회적 가치에 무게를 둔 목표를 설정하고, 열악한 감정노동자의 근무환경 개선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강요에 의한 친절은 한계가 명확하다. 노동자의 행복이 친절을 담보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응대하는 노동자에게 무심코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꼭 고성을 지르거나 육두문자를 쏟는 것만이 갑질은 아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어퍼컷 펀치보다 자잘한 잽 펀치가 때론 더 무섭다. 상호존중과 배려하는 문화가 간절한 시점이다. 나를 응대하는 노동자의 밝은 미소, 그 이면에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승권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유성선병원 직업환경의학센터 진료과장

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회 대전·충청 지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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