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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뼘 더 높이 뛰어올라 입맞춤
  • 송길룡
  • 승인 2012.06.1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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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영화의 한 장면 (8) 바보들의 행진

고전영화를 하나씩 소개하면서 드는 고민 중의 하나는 독자들이 어떻게 하면 어렵지 않은 방법으로 같은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시네마테크의 특성을 지닌 고전영화전용관이 있어서 함께 영화를 보고 서로의 견해를 나눌 수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필자의 글과 같은 영화이야기를 쓰고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세종시의 지금 영화문화 여건에서는 꿈과 같은 일이다. 아쉬운 대로 한국고전영화에 관해서는 한국영상자료원의 온라인 VOD상영서비스(http://www.kmdb.or.kr/VOD/)에 의지해 보기로 한다. 회원 가입을 하면 여기서 소개하는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과 같은 영화를 단돈 500원에 관람할 수 있다. 현재 500편이 넘는 한국고전영화가 그곳에서 VOD로 제공되고 있다.

서울역을 향해 걸어가는 영자(이영옥)의 모습은 마치 어딘가 소풍이라도 가는 듯이 발랄하다. 역내로 들어가 ‘팔도사나이’를 부르는 예비군인들의 입영열차 옆을 지나갈 때에도 그저 군대 가는 한 친구를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보내는 심정 같아 보인다. 영자가 드디어 짧게 깎은 머리를 차창에 기댄 채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병태(윤문섭)를 발견한다. 영자와 병태는 서로 마주본다. 순간 그녀의 장난기어린 미소가 서려있던 얼굴이 굳어진다.

병태는 Y대학 철학과 학생이고 영자는 H대학 불문과 학생이다. 학과 대 학과 그룹미팅에서 처음 만났다. 꼭 어떤 연애를 한다기보다 그저 만나면 즐겁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는 사이였다. 가끔 장난삼아 병태가 키스를 하려 하지만 영자는 재치있게 따돌리며 거리를 두었다. 1970년대식 대학생들의 일상이 그들을 감쌀 뿐이었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은 그 당시의 영화를 소개하는 설명 속에서 거의 예의없이 ‘암울한 시대’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온다. 그 시대의 청년 영화들에 대해서는 ‘암울한 시대’의 젊은이들이 겪는 꿈과 고뇌와 사랑과 좌절 등등이 그려져 있다는 식의 표현이 상투적으로 제시된다. 이 영화 <바보들의 행진>도 마찬가지. 영화 속 청년들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자조하듯 말하지만 그것은 아직 젊은 치기를 간직하고 있고 아직까지 사람들에 대한 정직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이해된다.

병태의 친한 친구 영철(하재영)은 중고등학교 입시에서부터 불합격을 받은 자격미달의 성장기를 비관적으로 생각해왔다. 넉넉한 형편인 듯 보이지만 집에서 사는 것이 갑갑했는지 일찍부터 집을 나와 살았다. 좋아하게 된 여학생으로부터 실연을 당하고서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고 여겼는지 영철은 급기야 동해 바다 절벽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영철의 추락 장면이 있고 나서 곧이어 영자가 서울역을 활보하는 예의 그 장면이 나타난다. 영철이 투신을 선택한 것과 비슷한 방향에서 병태도 갑갑한 현실을 통과하기 위해 군입대를 선택한 것이다. 영자는 병태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갑자기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랑이라도 알게 되었던 것일까?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를 따라가며 깡충깡충 뛴다. 간절하게 병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려고 안간힘을 쓴다.

곁에 있던 헌병이 안아 올려주는 틈에 영자는 뜻한 대로 병태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약 없는 작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약속하는 다짐의 입맞춤이다.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한 뼘 더 껑충 키가 자라는 젊고 푸른 사랑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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