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문무를 겸비한 큰 호랑이, 김종서 장군
상태바
문무를 겸비한 큰 호랑이, 김종서 장군
  • 홍석하
  • 승인 2012.05.28 18: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군묘, 충남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산45

김종서는 1405년(태종 5) 16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인 정인지(19세), 한음 이덕형(20세), 성삼문(20세), 신숙주(22세)와 비교해도 김종서는 탁월한 지적능력의 소유자였고 역사책인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주도했다.


대호(大虎)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명신(名臣)으로 세종의 명에 의하여 1433년 야인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했다.
세종은 김종서에 대해 "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는 본디 유신(儒臣, 유학을 공부한 신하)으로 몸집이 작고 무예도 짧으며 행정능력은 뛰어나니 장수로서 마땅하지는 않다. 다만 그가 일에 임하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했다. 4진을 새로 처리할 때도 일을 처리한 것이 알맞아 그 효과를 보았으니 포상할 만하다." (세종실록 22년 7월 5일)라고 했다.


단순한 영토 확장만이 아니다. 여진족도 회유하고 농토가 없는 남쪽지방 조선백성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려 함이 김종서를 적임자로 판단한 세종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종의 유훈을 받들어 단종을 보위하다가 수양대군에 의하여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되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됨으로써 계유정난의 첫번째 희생자가 됐다.


김종서장군에게는 당시 효심 깊은 두 아들이 있었다. 이 두 아들도 아버지와 뜻을 같이하다 결국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여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두 아들의 자취는 찾을 길 없고, 효시당한 김종서장군의 사체 일부분만 고향으로 돌아와 그 참혹한 사건은 장군의 다리 한쪽이 선산에 묻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장군은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도 김종서 장군의 묘역이 있는 마을을 대교리라 한다.

그 후 3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영조22년(1746), 장군의 충절이 재평가 되어 복관(復官)되기에 이르고 당시 함께 죽어간 자식들 또한 재평가 되어 그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장군의 묘 입구에 홍살문을 세우고 그 뒤로 효자각을 세워 효행을 기리고 있으며, 장군 역시 비석조차 없었던 무덤에 비석이 세워져 문무(文武)를 겸비한 충신의 묘가 이곳임을 알리고 있다.


장군은 복권 되었을지언정 멸족을 당하였으니 제사를 지내 줄 직계 후손이 없다. 현재 장군의 묘가 있는 곳은 장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가 함께 있는 순천김씨의 종산으로 매번 시사 때나 명절 성묘 때 후손들이 장군의 묘를 찾을 뿐이다. 본래 있던 석물들 중 가장 오래된 비는 복관 2년 후인 1736년(영조 24)에 공주판관 이익진과 지방 유생들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조선좌의정절제김선생종서지묘’라고 2행으로 종서되어 있고 배면에 건립의 사연을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비는 1963년에 세워진 것으로 이 유적과 김종서의 행적을 자세하게 적고 있는데, 비명은 ‘대광보국숭록대부좌의정익 충익호절제순천김공종서지묘’라 되어 있다.


장군 묘역입구의 안내판을 지나면 장군의 묘까지 약 150m의 송림 오솔길은 자연석을 깔아놓아 숲길의 운치가 제법인 길이다. 오솔길을 지나 묘에 오르면 묘가 위치하고 있는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의 밤실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이 시조는 함경도 여진을 치고 육진을 개척할 때 부른 노래로 비겁한 반대파 때문에 만주회복의 대망을 이루지 못한 울분을 표현한 것이다. <공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유투어피아 참조>

안내 041-840-2814

Tag
#NUL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