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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小滿), 두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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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小滿), 두레이야기
  • 정규호
  • 승인 2012.05.2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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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호의 민속문화 엿보기

소만은 초여름이 시작되면서 일 년 농사 중 가장 바쁜 시기 중의 하나였다. 바야흐로 집약노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식을 기초로 공동노동조직인 두레나 품앗이를 통하여 슬기롭게 바쁜 시기를 넘겼다. 전통 농경 촌락사회를 이끄는 정신적 모태는 바로 공동체정신이였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처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결국 내가 잘 사는 것이라는 생활의 지혜를 바탕으로 마음이 시원한 여름을 맞이해 보자!

소만은 만물이 점차 성장하여 가득 차는 시기로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들어간다. 24절기 중 여덟 번째 들며, 태양의 황경은 대략 60도의 위치에 올 때이다.

옛 사람들은 소만을 5일씩 삼후(三候)로 등분하여, 씀바귀가 뻗어 나오고, 냉이가 누렇게 죽어가며, 보리가 익어 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절식으로는 죽순(竹筍)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 먹거나 씀바귀나물과 소만 때만 볼 수 있다는 천마를 시절식으로 해 먹었다. 특히 6월로 접어들면서 밀과 더불어 보리를 이용한 음식을 즐겨 먹었는데 거의 여름철 주식이였다.

연푸른 잎새가 점점 녹음으로 짙어가는 이 시기는 본격적인 여름의 분위기로 접어들 때이다. 특히 밀, 보리 수확준비를 비롯하여 모내기 준비, 밭작물 김매기 등 본격적인 농사철로서, 1년 중 가장 바쁠 계절로 접어들 때이다.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 들면서 집약노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때 이웃끼리 상부상조하여 노동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공동노동조직인 ‘두레’를 결성하고, 노동을 서로 주고 받는 ‘품앗이’ 풍속이 있었는데, 두레는 공동체 의식, 조직 등의 의미를 담은 뜻으로 현대사회에도 다양한 산업유형을 표현하는 어휘로 이어져 오고 있다.

공동노동의 대표적인 형태인 두레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조선 후기에 수도작농업이 전국적으로 보급됨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즉 두레는 수도작농업에서 행해지는 이앙법의 보급과 더불어 강화되었고,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은 노동력 수요의 정점기에 공동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두레조직의 체계화를 촉진시켰다.

두레는 조선 후기에 농업 생산활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민중들의 역사적 성장과 농민문화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두레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으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러서는 한반도 북부지역의 일부를 제외한 수도작 농업 지역 전체에 두레의 공동노동방식이 확산되었는데, 강원도·경기도를 분계선으로 하여 그 이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행해졌었다.

두레조직이 체계화된 것은 절기별이나 노동주기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특히 소만을 정점으로 해야 하는 김매기와 모내기는 일시에 집약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집약성은 필연적으로 효율적인 노동관리체계, 능률적인 농사방식, 다양한 농민문화의 조직화를 요구하게 되고, 김매기는 농민들에게는 가장 힘이 드는 일이고 호미를 사용해 섬세한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인데, 대개 초벌·두벌·세벌의 3번에 걸친 김매기를 해야 하고, 세벌 김매기가 거의 끝나는 칠월 칠석경에 이르러서야 한 해 농사의 힘겨운 고비를 겨우 넘기게 되었었으며, 이 때 두레의 최대 제축 행사라 할 수 있는 ‘호미씻이’를 하였다.



두레조직은 흔히 '두레 짠다'라고 하는데, 먼저 두레의 역원을 뽑고 일의 순서를 결정했다. 두레에는 마을단위로 농사를 짓고 있는 성인남자는 의무적으로 가입을 하고, 가입할 때는 '진서'라는 일정한 성년식의 절차를 거쳤다. 또한 생산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2가지로 나뉘어 구성 되었는데, 크게 노동을 하는 소임조직과 풍물패인 두레풍장이다. 이러한 두레는 현대농촌사회의 마을청년회와 유사하게 매우 민주적인 조직으로, 농사의 노동력 제공 뿐만 아니라 두레풍물패는 마을의 기금을 확보하여 마을 대소사에 자금을 마련해주는 기능도 하였으며, 마을의 청·장년들이 전원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향촌노동조직 가운데 가장 전투력을 가진 조직으로 외세의 침입에 전투조직으로서 기능도 수행하였다.

두레작업은 대개 아침 일찍 마을의 집회장소인 정자나무 밑이나 동청(洞廳)에 모여 두레기를 앞세우고 힘찬 풍물을 치며 논으로 향했다. 그리고 논에 도착하면 두레기를 평평한 곳에 꽂아두고 논에 들어가 장풍장을 치면서 작업을 해나갔다. 두레의 어른인 영좌·좌상 등이 일의 순서와 작업을 감독했으며 소리꾼이 주도하여 선소리를 메기면서 두레일의 신명을 돋우었다. 한 곳의 일이 끝나면 다시 풍물을 치면서 다음 작업장소로 이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하루 작업이 완전히 끝나면 길군악을 치면서 마을로 돌아와 한바탕 놀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지역공동체 의식이 요구되고 있는 이 시대에 ‘두레’는 선조들의 슬기와 지혜가 함축된 지역공동체 의식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신명하는 풍물과 흥겨운소리에 맞춰 일을 함으로서, 노동의 힘겨움을 잊고 오히려 즐겁게 일을 하며 농작업의 효율을 높이고 마을사회를 존속하기 위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해왔던 ‘두레’정신을 되새기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의 자세를 가다듬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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