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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희롱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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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희롱하지 마세요
  • 송길룡
  • 승인 2016.05.26 1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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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영화의 한 장면 (4)] 바람불어 좋은 날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 사람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간절한 심정이 되었을 때, 왜 그때마다 턱없이 부족한 자신의 형편을 돌아보며 낙심하게 되는 걸까. 반대로 재산도 넉넉하고, 외모도 세련되게 가꾸고, 가정형편도 좋고... 아마도 갖추고 싶은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할 때 왜 그때마다 모든 조건을 넘어선 순수한 사랑을 찾게 되는 걸까? 하지만 모자란 결핍의 사랑보다 완벽한 충만의 사랑이 쉬이 깨진다. 조건이 좋아질수록 사랑의 감정은 더 쉽게 흐려지기 때문이다. 서울로 상경한 가난뱅이 시골 남성이 서울 상류층 여성을 잠깐 만나는 데이트 장면이 퍽 인상 깊게 그려지는 한국고전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을 골라보았다.

중국집 배달원 덕배(안성기)는 자전거를 타고 음식을 배달하다가 치근덕거리는 남자친구로부터 벗어나려고 침착치 못하게 운전을 하던 병희(유지인)의 자동차에 치여서 넘어진다. 그런 인연으로 덕배는 병희의 집에 음식배달을 빌미로 초대받기도 하고 급기야 일요일 데이트 신청까지 받게 된다.

덕배는 비록 여러 모로 생활환경과 처지의 차이가 크지만 호감과 기대가 가는 병희와의 만남에 대해 순진한 시골총각들이 그러하듯 잔뜩 부푼 가슴으로 자신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다. 목욕도 하고 이발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 없는 돈에 멋진 옷을 골라입고 설레임으로 가득한 일요일 병희의 차에 함께 올라탄다. 병희는 자기의 눈에 촌티가 풀풀 나도록 우스꽝스럽게 차려 입은 덕배의 모습을 보고 연신 깔깔대며 웃는다. 자기 지갑을 열어 덕배에게 새로 옷을 사주며 갈아입힌다. 잔뜩 힘이 들어간 덕배의 머리카락을 풀어헤친다. 어리숙하고 말도 더듬고 연애도 한번 못해본 쑥맥 같은 숫총각의 수줍음이 병희의 장난기어린 마음을 불러일으켰는지 모른다.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인상깊은 한 장면이 바로 이 시점에서 펼쳐진다.

바람이 몹시 불어대는 공원 한 구석. 화면의 오른쪽에서 병희는 나무에 기대어앉아 덕배를 바라보며 웃음
을 짓는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하얀치마의 그녀. 그녀는 멋쩍게 쪼그리고 앉은 덕배의 다리를 자기 발로 툭 건드린다. 그리고 몇 마디의 대화 끝에 키스를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목을 쭉 빼고 고개를 들어 입술을 내민다. 그녀의 머리 뒤에서 불어닥친 바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온통 덕배를 향해 쏠리게 한다. 하지만 그 향기로운 세찬 바람을 자신의 얼굴로 받아들이는 덕배의 표정은 아직 일말의 의심이 서려있다. 이 키스를 진심으로 여겨야 할까?

이 영화는 1980년 서울 변두리 개발지역을 배경으로 하여 각각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돈벌이를 찾아 상경한 시골총각 3명의 서울살이와 연애담과 실패담을 파노라마처럼 늘어놓는다. 시대적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도시하층 이주민의 정서를 공감있게 표현하는 <바람불어 좋은 날>은 한국영화의 시대적 흐름에 한 분기점을 이루는 명작영화 중 하나다.

덕배는 결국 진심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병희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대려고 용기를 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얼굴을 바로 빼돌린 병희의 희롱하는 목소리. 덕배는 입맛을 다시고 침을 뱉으며 자신이 놀림감이 된 것에 속상해 한다. 자신이 꿈꿀 수 없는 부유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여성의 유혹은 그저 유혹에 불과했던 것이다. 덕배는 그런 사랑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모양이다. 그는 짧게 탄식한다. "내 그럴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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