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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연인의 어느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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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연인의 어느 일요일
  • 송길룡
  • 승인 2016.05.26 1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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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영화의 한 장면 (3)] 휴일


세월이 흘러 시대가 달라졌는데 구닥다리 옛날 얘기 같은 낡은 흑백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복고취향으로 축소될 수 없는 각별한 의미가 숨어있는 영화감상방식이다. 그 의미란 한 마디로 과거의 기억에 있다. 숨가쁜 현재를 살아가며 너무나 빠르게 망각해버리는 지나간 추억들. 그 중에서 가장 빨리 옛날 추억으로 묻어두는 것이 가난한 시대의 우울한 연애가 아닐까? 이번에는 한국고전영화를 골라보았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만추>(1966)로 널리 알려진 이만희 감독의 1968년 영화 <휴일>

젊은 남녀 한 쌍이 늦가을 어느 일요일 그들 외에 아무도 배회하지 않는 도심의 어느 텅빈 공원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우울한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커피 한 잔 마실 돈이 없어서 따뜻한 공기가 감싸도는 다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알콩달콩 애정을 나누는 그런 만남을 즐기지 못한다. 화면 왼쪽에는 지연(전지연)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책만을 일삼는 애틋한 연인 허욱(신성일)의 머리를 감싸고 있다. 화면 오른쪽은 마치 그 가난한 연인의 환경과 정서를 강조하듯 나뭇잎 하나 매달리지 않은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지연은 어떻게든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이라도 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허욱에게 화도 나고 안타까움도 느끼지만 여전히 그의 가난한 처지를 이해하고 감싸고 사랑으로 품으려 한다. 하지만 지연이 그런 태도를 보이면 보일수록 허욱은 더욱 더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애꿎은 지연에게 못난이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듯이 따귀도 때리고 더 이상 서로 만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비틀거리면서도 비틀거리기 때문에 서로 찾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오히려 가난이 그들의 사랑을 더욱 애틋하고 끈질기게 만든 것일까?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라진 일요일마다 서로 만나 돈으로 살 수 없는 연애의 정경을 만들며 살아간다.

그들의 사랑이 무르익은 나날의 어느 일요일, 지연은 자신이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허욱에게 알리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형편을 이야기하며 낙태를 하겠다고 한다. 빈털털이 허욱에게 그것만이라도 용기있게 책임지라며 병원비용을 마련하라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허욱은 자신이 알고 지냈던 친구들을 만나 돈을 얻으려 하지만 번번히 외면당하거나 자신보다 더 형편없이 빈곤과 절망에 찌들어있는 모습만을 만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어릴 적 ‘돼지’라고 욕했던 돈 많은 부자 친구를 찾아가 그의 돈을 훔쳐온다.

가난으로부터 시작된 연인의 고난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져만 간다. 낙태만 하면 한때의 괴로움이 모면될 줄 알았지만 정작 병원에서는 지연 자신의 병이 너무나 심각하여 수술을 하다가 자칫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른다고 한번 더 심사숙고를 당부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한창 산업화 과정이 전개되던 1960년대 후반 개발시대 이면의 모습을 보여주는 <휴일>은 영화 속에 담긴 그와 같은 우울하고 침울한 정서 표현을 탐탁치 않게 여긴 검열당국으로부터 강제수정요구를 받은 끝에 결국 개봉이 무산된 비운의 한국 고전명작이다.

옛날 영화 <휴일>의 연인들을 다시금 떠올리는 한편으로 현재 극장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연인들의 영화는 어떠한가 생각해본다. 영화관객들은 가난한 연인들이 등장하지 않는 사랑의 영화들을 봐도 될 만큼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돈 걱정 없이 서로의 애정을 키우는 남녀 주인공을 보고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그려내주고 있다고 받아들일 만큼 우리 사회는 빈곤을 벗어난 것으로 생각해도 될까? 우리 주변의 가난한 젊은 연인들을 한번쯤 살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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