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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당(學堂) 김 휴(金 休)공(公)의 묘소와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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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당(學堂) 김 휴(金 休)공(公)의 묘소와 유허비
  • 윤은실
  • 승인 2012.05.10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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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밝은 날이 저물으니, 물속에 놀던 고기떼들 쉴 곳으로 돌아가네.’

윤은실 (여. 48세)
연기군 문화관광해설사
호서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실버산업전공)

위치 : 연기군 미곡리 학댕이
전의면 동교리 샘골마을에서 신정리쪽으로 가다보며 장고개라는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를 넘자마자 작은 네 갈레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길로 약 1km쯤 가다보면 정면에서 왼쪽 위로 운주산이 보인다. 요즘처럼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날씨 좋은 봄날에 소풍가기 딱 좋은 곳 바로 학당 김휴선생의 묘소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닌 던 때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 양지바른 운주산 자락에 안동김씨 후손들이 묘역을 잘 관리하고 있어 깔끔한 인상을 준다.


학당 김휴선생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학당(學堂)이다.
1350년(충정왕 2) 고려 말 공조전서를 지낸 김성옥(金成牧)의 아들로 태어났다.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익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檢校)의 벼슬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 때 호군(護軍)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하신 아버지(김성목)를 모시기 위하여 사양하고 송도(松都)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오늘의 전의(全義) 운주산 아래에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漢城左尹) 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서울을 떠나 낙향하면서 읊은 시가 있는데,라고 하였다. 이는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자기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내포한 것이라 하겠다.
그는 평생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자손들에게는 법도를 가르쳤다. 그는 벗들에게는 신의로 사귀었으며,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듣기를 싫어하니 마을 사람들이 존경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또 초야(草野)에 묻혀 있으면서 학문을 더욱 빛나게 닦아 그의 문하생으로 충효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들이 유허비를 세웠고, 운주산 아래서 살았으니 지금의 전동면 미곡
리를 그의 호(號)를 따라 학당리(學堂里)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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