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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사랑의 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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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사랑의 응시
  • 송길룡
  • 승인 2016.05.26 1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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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영화의 한 장면]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여자는 피아노 건반 높이에 머리를 낮추고 앉아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남자를 위로 쳐다본다.

아름답고 쓰디쓴 사랑의 영화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막스 오퓔스, 1948)의 한 장면. 이때 여자의 얼굴은 화면의 한가운데에 있지 않고 약간 왼쪽 아래로 배치되어 있다. 애타게 기다려왔던 사랑이 어느새 자신에게로 꿈처럼 다가온 것을 그녀는 얼굴 표정으로 다 드러내준다. 그런 표정을 한편으로 두고 그녀의
얼굴은 화면 정중앙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것이다.

그녀의 눈앞에서 건반에 손을 얹고 건반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네는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선 끝에 놓여있다. 화면속의 남자는 의자에 앉은 자세에서 고개를 튼 뒷모습이다. 다시 정리하면, 이 화면은 여자 얼굴을 앞면으로 보여주되, 그녀가 낮은 자세에서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남자와의 시선의 거리 한쪽 축을 화면의 정중앙에 놓고 있다. 그러니까 화면의 초점은 그 시선의 거리, 그녀의 눈에서 막 시선이 방향을 잡고 움직여가는 그 지점을 중심점으로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의 초점 의미는 여자의 응시다.

영화에서 사랑은 어떻게 묘사되는가? 등장인물의 대사 속에 상대를 사랑한다는 표현이 들어있는 것. 따사롭게 서로를 포옹하고 애무하는 것.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서로의 육체를 한데 뒤섞어 뒤엉켜버리게 하는 것. 사랑이라는 낱말은 추상명사이지만 추상적인 개념을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할 수 없는 영화라는 시청각 매체에서 그것은 일면 불가해한 낱말이다. 영화에서 사랑은 인물들의 외면적 행동과 표정과 언어의 한계 바깥에 있다. 사랑은 영화에서 간접적이다. 그것은 관객이 스크린을 통해 깊이있게 미루어 짐작해야 하는 화면 너머의 감정이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1900년 무렵 비엔나를 배경으로 소녀시절에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 온, 촉망받기는 하지만 거의 매일 여자가 바뀌는 바람둥이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반한 후, 이어질 수도 끊어질 수도 없는 사랑에 운명처럼 이끌려가는 한 여인의 일생을 그려 내준다. 편지를 통한 회상의 형
식이 특징적인 걸작영화 중의 한 편이다.

밤마다 벽너머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 소리로 자신의 사랑을 키워가고, 늘 그 피아니스트 스테판(루이스 조단)의 곁에서 맴돌며 그의 시야에 자신의 존재가 각별하게 드러나기를 바라지만 번번이 연모의 대상이 벌이는 부질없는 카사노바 놀이에 낙담하는 소녀 리사(조앤 폰테인). 모친의 재혼으로 멀리 이사를 가면서 그녀의 짝사랑은 그쳐버리는 것 같았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성숙한 여인이 되었을 때, 때마침 다가온 안온한 미래를 약속하는 청혼을 물리치고 소녀시절의 끊어진 사랑을 찾아 리사는 다시 비엔나로 돌아온다.

예전의 그 아파트에서 리사는 스테판과 재회하게 되지만 재회의 의미는 그녀에게만 깊을 뿐 그는 소녀시절의 리사를 떠올리지 못한다. 리사에게 스테판은 오직 한 사람이지만 스테판에게 리사는 그저 많은 주변의 여자들 중 뭔가 특이한 느낌을 주는 누구라도 괜찮은 그런 한 사람 정도였던 것이다. 이 글의 앞에서 언급한 장면은 사랑의 의미가 엇갈리는 두 남녀의 만남이 절정을 이루는 바로 이 시점에 놓인다.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화면이 가득해질 정도로 깊은 애정을 얼굴로 뿜어내며 리사는 스테판을 응시한다. 그녀의 응시가 화면의 전면을 꽉 채우며 나타난다. 하지만 자칫 관객은 그런 분위기 때문에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응시를 놓치기 쉽다. 화면에 뒷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스테판의 응시가 그것.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떤 사랑의 모습을 읽어냈을까? 사랑한다는 말을 전했을 때 되돌아올 그녀의 대답? 따사롭게 포옹하고 애무하면서 느끼게 될 그녀의 온기?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서로의 육체가 뒤엉켰을 때 드러날 그녀의 쾌락? 그는 그녀의 응시를 마주 응시하면서 거기서 되비치는 자신의 욕망을 보는 데에 그친 것은 아닐까?

화면의 비스듬히 기울어진 한쪽 부분에서 맑은 사랑을 품고 응시하는 여자의 입술은 그녀의 곁에서 마주 응시하는 남자를 향해 어떤 의미심장한 하나의 질문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 정녕 내 얼굴 너머의 사랑이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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