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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깎은 고교 페미니스트, 불편과 맞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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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깎은 고교 페미니스트, 불편과 맞서기로 했다
  • 한지혜 기자
  • 승인 2019.03.07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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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 특집] ④ 세종시 고등학생 박나빈

1908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 1만 5000명이 손을 맞잡고 광장으로 나갔다.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은 1910년 열매를 맺는다. 국제연합(UN)은 이날을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했다.

오는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 제111주년이다. 노동계와 종교계, 시민사회 곳곳에서 평등과 여성 인권을 주제로 한 행사가 개최된다. 세종에서는 호수공원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열린다.

이곳에도 비슷한 길을 걸어갔거나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의 날 주간을 맞아 1970년대 노동운동 선봉에 섰던 여공들, 새로 출범한 세종시에서 여성운동의 길을 가는 사람, 10대 고교 페미니스트를 차례로 만나본다.

세상은 어떤 여성들이 바꿔왔는가. <편집자 주>

① 7080 여성노동사 원풍모방 임선호

② 7080 여성노동사 반도상사 장현자

③ 창립 1주년 (사)세종여성 정종미 대표

④ 세종시 고등학생 박나빈 <끝>.

세종시 고교 2학년 박나빈 학생.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1020 젊은 페미니즘이 뜨겁다. 동시대 전 세계 유래없는 젠더 논쟁이 펼쳐지고 있는 곳 바로 여기, 대한민국이다.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학생 활동가들이 지난 2월 초 유엔(UN) 제네바 사무국을 방문했다. 지난 한 해 교육계를 휩쓴 스쿨 미투 연설을 위해서다. 유엔은 오는 9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82차 UN 아동권리위원회 회의에 이 의제를 포함시켰다.

모두가 피라미드의 꼭대기만을 향해 달리는 학교. 이 와중에 ‘젠더 이슈’를 탐독하며 거리로 나온 10대들이 있다. 서적을 찾아 읽고, 페미니즘 관련 물품을 후원하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난상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성평등 의제와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세종시 10대의 시각은 어떨까? 올해 고교 2학년이 된 박나빈(18) 학생을 통해 들어봤다.

다음은 박 양과 나눈 일문일답.

ㅡ 지난해 가장 뜨거웠던 사회 이슈는 젠더 논쟁과 페미니즘이었다. 1020 세대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실제 체감하는 분위기는 어떤가.

“당장 지난해 여름, 세종시 모 고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성희롱, 성추행 피해를 입은 사건이 있었다. 경찰에도 신고됐지만, 조용히 묻혔다. 작게 언론에 나긴 했는데, 아마 물어보면 모르는 학생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며 매일 새롭게 실망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최근 미투 운동에 대한 조롱을 보면 그렇다. 뉴스 댓글들을 보면 저열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최근 들어 주변 친구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ㅡ 젠더 이슈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제일 먼저 기억나는 건 소라넷(국내 최대 음란물 사이트) 문제가 가시화됐을 때다. 중학교 1학년때였는데, 트위터를 통해 불법 포르노 사이트가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계정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며 깊은 분노를 느꼈다. 어디에 말할 곳도 없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내가 미성년자라는 사실이 무력감으로 다가왔다. 처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그 뒤로 페미니즘 관련 후원도 하고, 직접 불편한 용기(불법촬영 규탄) 시위에도 참가했다. 전시회도 보고 왔다. 첫 시위 참여 경험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이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참가하게됐다. 그날 집에 오는 버스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ㅡ 페미니즘을 보는 시각도 각양각색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모든 여성의 기본적인 권리를 추구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기본이다. 여기서 권리란 내 세대만이 아닌 다음 세대 여성들의 권리를 포함한다. 젠더 감수성은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싶다. 남성, 여성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많다. 하지만 단순히 모른다고 상대를 무시해버리는 것은 아주 게으른 태도다.

보통 우리는 지금 일어나는 논쟁들을 타인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뉴스나 방송에서만 나오는 먼 이야기로 느낀다. 하지만 그 일이 내 주변으로 오면 달라진다. 나 역시 중학교 1학년 때 친한 친구가 겪은 사건을 통해 현실 세상을 실감하게 됐다.”

ㅡ 최근 사회 흐름과 맞물려 청소년기 학교에서 젠더 감수성이나 성 인권, 성평등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교육은 당연히 필요하다. 어린 친구들이 여성 혐오적 콘텐츠에 너무나 쉽게 노출되고 있다. 당장 유튜브만 봐도 그렇다. 학교나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듣게 되는 초등학생들의 발언도 경악스럽다. 당장 교실에서 아이들은 과연 어떤 단어들로 이야기하나. 성평등 교육이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이 있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과연 성평등 교육이 논쟁거리인지도 되묻고 싶다.

당장 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여성적 어조와 남성적 어조를 구별하고 있다. 가르치는 선생님조차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신다. 식민지 민중의 비극적 일상을 다룬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은 어떤가. 사실 가부장제 하의 여성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문학 작품도 너무나 많다.”

지난해부터 페미니즘, 성평등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박 양의 방 한 쪽 벽면. 임신중절합법화 시위 관련 물품들이 붙어있다. 

ㅡ 머리가 굉장히 짧다. 최근 탈코르셋(남의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 꾸미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사회적 운동) 열풍이 불고 있는데, 같은 선상인가.

“원래 그전까지 머리가 허리까지 길었다. 지난해 11월 기말고사 직전 머리를 짧게 깎았다. 삭발이 아니어서 학교 교칙에 위배되진 않는다. 몇몇 선생님들은 지나가는 말로 “멋있다”, “나도 한 번 시원하게 깎아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겨울이어서 “춥지 않느냐”고 묻는 선생님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어서 속으로 약간 미묘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관심 있게 보던 같은 반 친구 3명도 머리를 짧게 잘랐다. 덕분에 외롭다는 생각이 덜 든다(하하).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서울 탈코르셋 전시회에 사진을 보냈다. 주변 친구 중에는 탈코르셋 이후 부모님께 집에서 내쫓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경우도 있다.”

ㅡ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탈코르셋 열풍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나.

“탈코르셋은 단순히 화장품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동시에 외모지상주의를 탈피하는 목적도 있다. 머리를 자른 것도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다. 대부분의 픽토그램을 보면 여자는 치마를 입고 리본을 달고 머리가 길지 않나.

일부 사람들이 탈코르셋 역시 여성의 주체성을 억압하는 것이니 옳지 않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는 대대적으로 탈코르셋을 하라고 억압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개인이 느끼는 거부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아동용 화장품의 소비 급증 추세를 보면 걱정이 많다. 한 유명 온라인 쇼핑몰 매출에 근거하면, 유아 립스틱 매출 549%, 유아 매니큐어 233% 증가 등 믿지 못할 수치가 나오고 있다. 중고생 쌍꺼풀, 안면 윤곽 ‘얼마’라는 광고도 버젓이 걸려있는 세상이다.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가?”

ㅡ 성 대결로 흐르고 있는 한국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반면 한국만큼 페미니즘이 사회 이슈화되고 있는 사례도 드물다는 발전적인 이야기도 있다.

“페미니즘도 여러 양상이 있다는 것을 공부하면서 알게 됐다. 재밌는 사실은 서양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 페미니즘 운동은 꽤 성공한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튜브를 통해 듣는 외국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면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만큼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한 곳이 없다.

이슈도 정말 빠르게 변한다. 탈코르셋 이야기 나온 때가 벌써 지난해 8월이다. 지금은 여성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논제에 대해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탈코르셋으로 생긴 자본을 자기 발전에 투자하고, 적금을 들어 목돈을 만들고, 경제학을 공부하고, 정치를 공부하자고 한다. 지난해부터 적금 통장을 만들었다. 생각보다 꽤 많은 용돈을 모았다.”

ㅡ 한국 페미니즘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됐으면 하나.

“페미니즘은 여성 인권 운동이다. 어쩌다가 남성의 인권도 함께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생긴 건지 모르겠다. 성별이 대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반대쪽의 흙을 뺏어 와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불법 촬영 카메라가 무서워 핸드폰 카메라에 빨간 셀로판지를 붙이고, 스티커와 튜브형 실리콘을 가방에 넣어 다닌다. 이런 사회에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건 너무 순진한 말이다. 우선 여성 인권 운동이라는 취지대로 여성들의 일에만 힘썼으면 좋겠다.”

박 양이 지난해 읽은 페미니즘 관련 도서와 각종 집회 참여 팜플렛.

ㅡ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궁금하다.

“하도 남자들이 여자도 군대 가라는 이야기를 하니까 한 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지 않나 싶다. 장교가 돼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보고 싶다. 사실 지금의 법 구조는 여성들이 국방 의무를 실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실현하라고 하는 것 아닌가. 실현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하는 셈이다.

또 지금과 같은 사회에서 여성들이 군대에 가면 어떻게 될까? 군대 내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 주기적으로 보도되는 부하 장교 성추행 뉴스만 봐도 알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해 큰 권력을 가지고 싶다. 그러면 남성 중심 사회에 들어올 다음 세대 여성들이 좀 더 편할 수 있지 않을까. 육군사관학교가 너무 높으면 차선으로 대학 ROTC도 있다(하하).

ㅡ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나.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입문서로 추천할만한 도서가 있다면?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수전 브라운밀러 저), <페미니즘을 팝니다>(앤디 자이슬러 저)를 읽었다. 가장 최근에는 <백래시>(수전 팔루디 저)를 읽었다. 가장 처음 접한 책은 중학교 3학년 시절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이민경 저)이다. 개인적으로는 정치학에도 관심이 생겼다. 최근 <언어와 권력>을 읽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면 다양한 책을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다. 전문 세미나도 가고, 직접 여러 정보를 찾아보면 도움이 된다. SNS는 검열도 덜 되고, 부정확한 정보도 많다. 주로 이슈 변화 흐름, 큰 논쟁 거리가 있을때 참고한다.”

ㅡ 끝으로 또래 세대와 기성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페미니즘은 재미로 할 수 없는 공부다. 오히려 피곤하기만 하다. 성차별을 인지하는 순간 사소한 모든 것들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낙인찍히거나 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의 시선도 알고 있다.

최근 어딘가에서 읽었던 문구가 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은 내 위의 누군가가 바꾸지 않았던 일이다’라는 말. 내가 괜찮다고 넘어가면 누군가가 이 일을 똑같이 겪는다. 작은 행동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용기를 얻은 것처럼 우리 누구나 타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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