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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뱅이 헤라클레스, 그토록 고생하고 또 불행 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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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뱅이 헤라클레스, 그토록 고생하고 또 불행 자초
  • 박한표
  • 승인 2018.03.0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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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표의 그리스로마신화 읽기] <25-14>헤라클레스의 늦장가
박한표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 문학박사

헤라클레스는 아르고 원정대에서 이탈한 후, 칼리돈 왕국(‘칼리돈의 멧돼지 사냥’ 이야기에 나오는 멜레아그로스의 고향)의 공주 데이아네이라(멜레아그로스의 누이)와 재혼한다.

데이아네이라는 남성을 혐오할 뿐만 아니라 싸움 구경을 유난히 좋아하는 처녀였지만, 구혼자가 많았다. 구혼자가 많다고 처녀가 행복해지는 건 아닌가보다. 헤라클레스가 칼리돈왕국에 도착했을 때 가장 유력한 구혼자는 아켈라오스(강의 신)였다.

헤라클레스는 아켈라오스의 독설에 화가 나 멱살을 잡자 그는 뱀으로, 다시 황소로 변신했다. 헤라클레스는 황소의 뿔을 분질러 풍요의 여신 키벨레에게 선물했다. 키벨레 여신이 축복하자, 이 황소의 뿔은 아무리 꺼내어도 늘 먹을거리와 꽃으로 가득 찼다. 이 황소의 뿔이 '풍요의 뿔(코르누코피아)'이다.

‘헤라클레스와 데이아네이라’ 얀 호사르트, 오크 패널에 유채, 36.8×26.8㎝, 1517년, 바버미술관(영국 버밍엄)

코르누코피아처럼 아무리 퍼내도 쌀이 자꾸자꾸 차오르는 항아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소망이 있을 것이다. 신화의 세계에는 그런 쌀독이 얼마든지 있다. 세계 어느 나라 신화나 민담을 들춰보아도 이런 항아리가 등장하지 않는 신화나 민담은 없다. 신화에는 사람들의 바람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민담에도 그런 항아리가 등장한다. 아무리 꺼내도 자꾸자꾸 먹을 것이 차오르는 ‘화수분 단지’가 바로 그런 기적의 단지다. 세상 끝나는 날까지 쌀을 갈아 대는 ‘혼자 도는 맷돌’도 그런 기적의 맷돌이다.

바우키스와 펠레몬 이야기에도 화수분 같은 술병이 나온다.
“[…] 식사가 계속될 때의 이야기인데, 바우키스와 펠레몬은 술을 자꾸 따르는데도 따르는 족족 술병에는 새 술이 차는 데 놀랐지.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걸 보았으니 얼마나 놀랐겠으며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겠는가? 노부부는 ‘아이고, 여느 손님들이 아니라 신들이시구나.’ 이렇게 짐작하고는 손을 벌리고 제우스와 헤르메스께 빌었지. 신들인 줄 모르고 허름한 음식을 대접한 무례를 용서해 달라고 말이야. […]”

동서양을 막론하고 삶에서 먹을거리는 그토록 중요하고 또 절박했던 모양이다. 데이아네이라를 차지하고 헤라클레스는 행복해야 하는데, 영웅은 죽지 않는 한 쉬지 못한다. 늦게 등장한 미모의 아내 데이아네이라가 문제를 일으켜서다.

결혼 후 헤라클레스는 한동안 처가인 칼리돈 궁전에 머문다. 그러던 중 칼리돈 궁전에서 오이네우스(장인)가 베푼 잔치 자리에서 술에 취해 실수로 친척 소년, 즉 왕의 조카인 에우노모스를 죽이는 바람에 아내와 함께 그 나라를 떠나 또다시 트라키아로 떠나게 된다.

‘데이아네이라를 납치하는 네소스’ 귀도 레니, 캔버스에 유채, 230×190㎝, 1617-1621년경, 루브르박물관(프랑스 파리)

헤라클레스는 술에 취해 저지른 허물 때문에 그 오랜 세월을 종살이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술 앞에서는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잔치에서 소년이 빠른 속도로 비우는 헤라클레스의 술잔에 술을 채우려고 다가갔다. 마침 헤라클레스가 활 쏘는 이야기를 하다가 시위 당기는 시늉을 하며 오른 팔꿈치를 뒤로 당겼다. 하필 술을 따르려고 다가서던 소년이 공교롭게도 그 팔꿈치에 맞고 즉사했던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데이아네이라를 데리고 트라키아로 가던 중 강을 건너게 된다. 그는 강을 건너면서 아내를 켄타우로스 족인 네소스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네소스가 아내를 범하려고 했다. 헤라클레스는 네소스에게 화살을 쏴 죽였다. 화살에는 메두사의 독이 묻어있었다.

네소스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피를 ‘사랑의 묘약’이라고 속이고 독이 묻은 옷자락을 헤라클레스의 아내에게 준다. 헤라클레스가 다른 여자를 좋아해, 자신을 떠나려 하면 피에 젖은 옷자락을 남편의 옷 속에 숨기라고 말해주었다. 이것은 켄타우로스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케이론과 우두머리 폴로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된다.

헤라클레스는 죄를 닦기 위해 트라키스 왕 케이크스를 만난다. 헤라클레스는 죄를 닦기 위해 종살이를 하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처자식 죽인 죄는 에우리스테우스 밑에서, 이피토스 죽인 죄는 옴팔로스 밑에서 닦았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케이크스 왕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즉 삽입된 ‘액자 이야기’다.

‘물총새’의 비밀을 아십니까?: 케이크스와 알키오네의 행복과 불행 이야기는 헤라클레스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실수로 지은 죄를 닦기 위해 찾아간 나라의 왕이 털어 놓는 신세타령이다. 트라키스의 왕 케이크스는 참 특이한 사람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기도가 통하는, 다시 말하면 기도의 간절함으로 무엇이든 가능한 세상 이야기다. 케이크스는 오지 않은 미래의 일에 늘 근심이다. 근심의 뿌리를 뽑으려다 삶의 뿌리마저 뽑을 지경이다. 실제적으로 케이크스는 헤스페로스(금성)의 아들로 용모도 준수하고 복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알키오네는 바람의 지배자 아이올로스의 딸로 매우 예쁜데다가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그런데 케이크스는 겉으로만 행복해 보일 뿐 사실은 미래를 알고 싶어서 안달이다. 아내 알키오네는 행복을 느낀다면 그냥 느끼면서 살면 되는 것이라고 하며 달랬다. 그러나 케이크스는 기어코 아폴론 신의 뜻을 물으러 클라로스로 갈 것을 고집했다. 헤라 여신이 그런 케이크스를 곱게 보지 않았다.

행복한 가정의 뿌리를 흔드는 것은 의심과 의혹이다. 결국 케이크스는 아내에게 달이 두 번 찼다가 기울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하고는 길을 떠났다. 뱃길로 떠난 그는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에 휘말려 죽고 만다. 아내 알키오네는 남편의 죽음을 모른 채 결혼과 가정의 수호신 헤라에게 남편이 살아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헤라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손아래 거느린 여신 이리스(무지개)에게 부탁한다. 히피노스(잠)에게 부탁하여 알키오네의 꿈속에서 남편의 죽음을 알리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술에 취한 헤라클레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오크 패널에 유채, 220×220㎝, 1612-1614년경, 알테마이스터 회회관(독일 드레스덴 츠빙거 궁전)

히피노스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다.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는 데 명수인 꿈의 신 모르페우스도 그 중 하나다. 모르페우스가 죽은 케이크스로 변장하고 알키오네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죽었음을 알린다. “이제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날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는 일뿐이오. 그대의 눈물이 내 주검을 적시지 못하면 나는 장차 타르타로스(무한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오. 어서 일어나 바닷가로 나가 보세요.”

실제 죽은 자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려줘야 한다. 실컷 울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울음은 죽은 자보다는 살아남은 자를 위한 것일 수 있다. 헤라 여신은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서 살아 있는 알키오네와 죽은 케이크스를 새로 변신하게 하니, 이 새가 오늘날 우리가 ‘알키오네의 새’라고 부르는 물총새다.

뱃사람들은 물총새가 알을 낳고 깔 즈음에 항해하기를 좋아한다. 무슨 연유인가? 케이크스와 알키오네 부부는 물총새로 환생해 알도 낳고 그 알을 까기도 한다. 알키오네의 아버지 아이올로스(바람의 지배자)는 이들이 낳은 알이 부화하고 그 어린 새가 하늘을 날 수 있을 때까지는 바람을 단속하여 외손자들의 놀이터인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부부의 불행은 남편 케이크스의 의심과 의혹이 불러들인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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