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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조선반도 식량기지화 전략
  • 전재홍
  • 승인 2017.10.2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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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ㆍ米ㆍRice’] <7>마구평수리조합과 탑정저수지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 | 건축공학박사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이번에는 일제가 조선에서 쌀 수탈을 위해 식민지 지주제의 전형으로 창설한 수리조합에 대해 살펴본다. <편집자 주>

마구평수리조합

1940년 건축되어 지금은 멸실된 논산 마구평수리조합. 고바야시 농장 초입에 위치했으며 단층 목조로 건축됐다. 2003년 전재홍의 사진.
1930년 2층 양식으로 건축된 전북 익산의 익옥수리조합. 관할지가 익산과 옥구지역으로 쌀 생산량이 많아서인지 건물 규모면에서 마구평과 비교된다. 익산문화재단이 사용 중. 2003년 전재홍의 사진.

일제가 조선을 식량·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중점을 둔 것은 농사개량과 관개 수(水) 확보였다.

개별 농장 단위로 농사 개량은 추진할 수 있었으나 관개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관개 수(水) 확보책으로 기존의 수리 시설을 활용하기 위해 기존의 제언(堤堰)·보(堡)를 조사한 후 보조금을 지급해 복구·수축토록 했다.

복구·수축 사업은 기존 수리 시설과 관개답(灌漑畓)을 대상으로 한 만큼 조선인 지주의 토지가 중심이 됐을 뿐 아니라 넓은 면적으로 관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주로 방대한 천수답(天水畓)이나 황무지를 매입해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일본인 지주들은 새로운 수리 시설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일본인 지주들은 일제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일본의 수리 조합 조직을 본 따 수리조합 사업을 추진했다.

1945년 광복 때까지 조선에서 창설된 수리조합은 639개에 달했다. 지역별로는 전북 56개, 충남 43개다.

수리조합을 중심적으로 추진한 주체는 일본인 대지주였다. 이로 인해 수리조합 지역 내에 조선인의 토지상실과 일본인의 토지집중이 급속히 진행됐다.

수리조합지역은 식민지 지주제가 전형적으로 전개됐으며 마구평 평야가 그 실증 현장이다.  

러일전쟁 이후 마구평에 일본인 농장개설이 늘어 하마노(濱野), 고바야시(小林), 미라이(末永), 나가쓰(永津), 마쓰모토(松本), 도세키(東拓), 쿠니타케(國武), 후지모토(藤本) 등 개인과 회사농장이 존재했다.

1909년 탁지부령으로 수리법이 발표되자 일본인과 한국인 조합원 110명으로 구성된 공동수리조합 설립됐다. 마구평수리조합은 옥구서부수리조합에 이어 두 번째로 설치됐으며 충남에서는 가장 앞섰다. 

수리조합 설립은 천수답에 의존해 농사를 지으며 농사실패를 거듭하던 고바야시(小林) 농장이 주도했다. 물 공급원인 안천리에 연못을 조성하고 수로를 만들어 용수를 공급했다. 안천리 연못은 현재 탑정저수지에 수몰된 지역이다.

마구평수리조합은 박영규 씨가 불하받아 거주했다. 박 씨가 거주할 당시 방으로 개조된 실내를 안내하고 있다. 2003년 전재홍의 사진.
마구평 중심지에 있는 수리조합(왼쪽)과 마구평소학교관사(오른쪽)는 지척 간에 있다. 2007년 전재홍의 사진.

초기의 명칭은 연산수리조합이었으나 후에 마구평수리조합으로 개칭됐다. 조합장은 면장 조종국이 맡았고, 고바야시(小林澄), 나가쓰(永津市作), 하마노(濱野鐵藏), 임창혁(任昌爀), 김영휘(金永暉) 5명이 평의원에 선정됐다.

1940년 단층 일식 목조로 건립된 수리조합건물은 고바야시 농장자리 초입에 위치한다. 광복이후 1991년까지 논산수리조합이 사용했었다.

이후 박영규 씨가 불하를 받아 거주했으며, 멸실된 뒤 음식점이 들어섰다.

탑정저수지

탑정저수지는 일제강점기 말 마구평수리조합의 수원인 안천리 연못을 수용하며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로 태어난다. 우측 수면위쪽이 안천리다. 2017년 전재홍의 사진.
2007년 겨울의 여수로. 10개의 수문이 있었다. 전재홍의 사진.
수력발전을 마친 농업용수는 수로를 따라 논산-강경평야로 흘러든 뒤 금강으로 빠져나간다. 2017년 전재홍의 사진.
마구평수리조합 창설당시에 조성된 흙 제방 수로가 보강을 거치며 콘크리트 수로로 바뀌었다. 2017년 전재홍의 사진.

탑정저수지는 마구평수리조합의 수원인 안천리 연못을 수용하며 일제강점기인 1941년 착공, 1944년 8월 준공됐다.

마구평을 포함한 논산-강경평야에 원활한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제방 길이 570m, 높이 18m로 충남에서 예당저수지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1943년 충남지사 야마키 후미히로(山木文憲)가 쓴 ‘풍수제민(豊水濟民)’이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야마키 후미히로는 본래 이름이 송문헌(宋文憲)인 친일파다. 2017년 전재홍의 사진
1955년 4월 23일 70여명의 논산 기민중학교 학생들이 탑정저수지로 소풍을 왔다. 논산문화원제공
탑정저수지와 마찬가지로 일제기에 건설된 대아저수지. 익옥수리조합의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1922년 전북 완주군에 준공됐다. 제방 구조는 아치형이고 길이 254m, 높이 33m로 오래된 근대식 댐이다. 1927년 발행 전라북도요람.
1922년 준공, 100년이 되어가며 노후화가 진행되고 거기에 저수량도 작아 1989년 새로운 댐을 축조했다. 신 대아댐으로 물속에 잠기는데 몇 년에 한번 가뭄이 극심할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전재홍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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