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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형태로 삶을 압축한 조각가 권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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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형태로 삶을 압축한 조각가 권진규
  • 이순구
  • 승인 2017.05.0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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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의 미술산책] <12>권진규의 ‘자소상’과 ‘소’

절제된 아름다움은 꼭꼭 씹을수록 그 맛이 진하다. 우리의 정서에서 만나는 절제미는 다양하다. 바지랑대에 매여 하늘을 가르는 빨랫줄, 잔잔한 수면에 낙엽이 떨어지며 일어나는 파문, 고즈넉한 초저녁에 뜬 달의 외곽선, 이슬에 젖어 떨어지는 물방울, 미풍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 등.


우리는 오랜 시간을 사용한 어머니의 빨래방망이나 맷돌, 이른 아침 사찰에서 만난 노스님의 옷깃에서 그런 간결함을 발견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란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간을 지나온 것들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의 미술이란 단순히 화가나 조각가에 의한 것만이 아닌 우리의 삶 속에서 엮어진 결과가 아닌가싶다.


한국근대미술은 대부분 19세기 말 서양문화가 들어오는 시기를 그 시작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맞물린다. 서구의 미술기법들은 들어오면서 이를 수용하는 화가나 조각가들에 의해 전통문화의 바탕아래 수용되고 변화 발전되어졌다.


권진규(權鎭圭, 1922~1973)는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나고 자랐으며 혼란의 세월 속에서 활동했다. 그는 1948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각을 공부했다. 그의 작품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학창시절의 나부, 청년 등 인물상이고 둘째가 자소상, 여인좌상, 인물흉상 등을 테라코타나 건칠(乾漆)로 제작한 인물상이다. 셋째는 추상, 구상 등의 동물상, 그리고 다양한 동세의 부조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들인 인물상들은 테라코타와 건칠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의 손맛과 느낌이 우러난다. 재료의 신비로운 특성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거친 표면과 숨 쉬는 듯 움직임이 표현적인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동물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는 형태가 극대화 또는 단순화에 의한 해학적인 표현도 묻어난다. 이것은 과감한 생략과 왜곡된 형태감을 통해 자신만의 양식을 확립한 것이다.

 

 

그의 <자소상>을 보면 언뜻 스님이 떠올려진다. 하지만 작가자신을 모델로 만든 작품으로, 예술가의 구도적 자세를 스님의 모습을 빌려 표현한 것이다.


정면을 향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그윽한 목의 동세는 구도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인물 조각들의 공통점은 정적(靜的)이긴 하지만 시선을 약간 위로 향하고 있어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하며 이로 인해 구도(求道)의 느낌을 들게 한다.


이러한 그의 인물상들은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조각을 통해 영원을 향한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찾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고도로 절제된 긴장감, 정적이고 함축된 절제미 그 이상이다. 그의 작품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은 격하지 않고 늘 잔잔하다. 그 잔잔함 뒤에서 서서히 우러나오는 격한 아름다움은 그 다음에 느끼는 감성이다.


지나치리만큼 길게 내민 목과 사선으로 좁게 처리된 어깨는 삶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초탈한 내면의 세계에서 마치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인생이란 혼돈의 터널을 통과하고 고통과 상처를 동반한 구원을 갈구하며, 구도의 여정 끝에서 무념과 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움푹 들어간 눈, 높은 콧대, 머리카락이 없는 둥근 두상과 좁은 얼굴의 형태는 이상적인 구도자의 모습으로 보인다. 머리카락의 번민을 내려놓고 최소량의 음식만 섭취해 볼이 패이고, 마음깊이에서 나오는 눈빛, 그것은 바로 구도자의 모습이다.


그가 추구하는 지향점은 순수한 영혼의 모습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영원성이었다고 한다. 이는 마치 고대 조각들이 추구한 영원성과 닮아있다. 본질을 꿰뚫는 생생한 눈빛으로 직시하며 구도를 갈구하는 영원성이다. 그리고 단순한 색감의 테라코타가 주는 단조로움을 붉은 색 가사로 다르게 처리한 작가의 재료에 의한 변주는 재료의 질감에서 오는 물성을 미묘하게 변화시키며 성스런 분위기로 승화시킨다.

 

 

그의 다른 작품 <소>는 인류초기의 동굴벽화에 나오는 소를 연상시킨다. 상처를 입고 움츠려 등을 혀로 핥는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모양새다. 언뜻 보면 쉽게 주물러 만든 미완성적인 초등학생의 찰흙 만들기와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앉아서 목을 돌린 소의 움직임은 절박한 동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의 단순화한 특징들과 움직임조차 한 덩어리 속에 표현한 간결한 질량감은 소조예술로서 소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본연의 타고난 예술적 기질과 습득되어진 전통이 융화된 감수성에 의해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의 간결함은 <자소상>의 그것과 닮아있다.


권진규의 두 작품은 화려함과 빠름을 구가하는 우리시대에서 미학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조각가 권진규는 시대의 고통 속에서 끝내 자살을 선택했지만, 그의 삶은 절제되고 압축된 형태의 구도자를 만들어냈다. 압축된 삶의 시간들로 이루어진 그가 남긴 소박한 형태의 작품들에서 강직한 의지와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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