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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권력의 이공계 지배
  • 이충건
  • 승인 2017.04.2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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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브리핑] 5.9 대선의 시대정신
세종포스트 대표 겸 편집국장

컴퓨터 자판은  ‘Q, W, E, R, T, Y’ 순으로 배열돼 있다. 글쇠의 배열순서에 따라 쿼티(Qwerty) 자판이라고 부른다. 원래 타자기의 글쇠 배열은 알파벳순이었다. 쿼티 자판의 유래는 인접한 글쇠를 연달아 치면 글자가 엉키는 문제가 발생해 고안해냈다는 게 정설이다. 타자 속도를 일부러 늦춰 글자 엉킴을 방지하려했다는 것이다.

1932년 미국의 교육학자 오거스트 드보락이 ‘쿼티’보다 입력 오류가 적고 타자속도가 더 빠른 자판을 개발했다. 드보락 자판이다. 더 능률적이고 배우기가 쉬운 것으로 평가됐다.

컴퓨터 시대의 도래로 타자속도를 늦출 필요가 없어졌지만 ‘드보락’은 ‘쿼티’의 대안이 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전환비용(Switching cost)이 많이 들어서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란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성을 ‘경로의존성(Path dependance)이라고 한다. ‘쿼티’는 이 경향성을 설명하는 고전적 사례다.

4차 산업혁명교육혁명이 5.9대선의 시대정신

5.9 대선이 코앞이다. 나는 요즘 대선 이슈 중, 물론 크게 부각된 쟁점은 아닐 수 있지만, ‘4차 산업혁명’과 ‘교육’에 가장 관심이 많다.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시작된 거대한 물결이다. 4차 산업혁명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세계경제 지도가 달라질 게 분명하다. 나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처 능력’이 이번 대선에서 요구되는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산업구조는 노동에서 증기기관, 전기, 컴퓨터(IT)로 이행돼왔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은 딱 꼬집어서 규정할 수 있는 영역이 없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로봇 등이 혼합돼 해일처럼 몰아치고 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없어질까? 또 어떤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까?

4차 산업혁명은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나에게 닥친 문제다. 나 자신은 고사하고 내 자식이 미래사회에 생존할 수 있는 학습능력을 갖고 있는지 불안하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이 강조하는 맥락적 사고(Contextual thinking)를 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야 하는데 지금의 학교교육은 그렇지 못하다.

실패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카이스트 개혁

기존의 지식과 경험에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덧붙일 수 있는 사유능력이 맥락적 사고다. 지식과 지식의 관계에서 새로운 지식이 나온다는 얘기다. 그것이 혁신이고 창의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지 못하면 ‘고착(Lock-in)’에 빠진다. 한 번 빠진 경로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혁신하지 못하면 새로운 경로는 결코 생기지 않는다.

나는 안희정에게서 맥락적 사고를 읽었다.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그가 제안한 대연정은 이승만-박정희-김대중-노무현이란 역사의 맥락을 거쳐 완성된 시대정신이었다. 물론 낡고 오래된 폐단은 걷어내야 한다. 하지만 과거에 집착해 ‘적폐’를 말하는 지도자에게서 새로운 경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카이스트(KAIST) 총장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러플린이 부임한 적이 있다. 러플린은 카이스트에 의대와 법대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 최고 인재들이 의대와 법대에 몰리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재들이 카이스트 의대에 오면 비티(BT, 생명공학기술)산업이 발전하고, 법대에 오면 지적재산 전문가들을 양성할 수 있다고 봤다. 돌이켜보면 러플린은 과학기술과 의학, 과학기술과 법학의 융합을 보고 있었다.

지식의 융합을 보지 못한 카이스트 교수들은 러플린에 저항했다. 과학기술 육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카이스트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인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결국 러플린은 취임 2년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러플린의 퇴장은 과학기술이란 영역에 고착된 대표적 사례다. 실패한 러플린의 카이스트 개혁, 나는 여기에서부터 우리나라의 교육혁명이 시작돼야 한다고 믿는다. 대선후보라면 교육혁명을 이야기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이 요구하고 있다.

인문사회 권력의 이공계 지배 탈피해야

자기부상열차, 첨단의료복합단지의 입지를 두고 지자체 간 살벌한 경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각 지자체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고, 행정력은 유치전에 집중됐다.

자기부상열차는 한국기계연구원이 개발한 첨단교통수단의 테스트베드를 구축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정부는 이미 인천국제공항 노선을 방침으로 정해놓고는 소모적인 경쟁만 유발했다. 경쟁은 평가가 전제돼야 했고, 평가는 무능력한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었다.

첨단의료복합단지는 세계적 수준의 신약과 의료기기를 개발하기 위해 추진된 사업이다. 애초부터 충북 오송이 대상지였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국립보건연구원, 질병관리본부 등 6개 국책기관을 이곳으로 이전한 것도 같은 취지다.

정부는 1곳만 선정하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충북 오송과 대구 신서 두 곳에 첨단의료복합단지가 조성된 이유다.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경쟁과 평가는 정부정책의 대표적인 경로의존성 사례다.

왜 이런 비효율적인 일들이 반복되는 걸까? 한국사회를 정치가 지배하고 있어서다. 인문사회 권력이 이공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걸 바꾸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나는 믿는다.

새로운 경로는 대한민국의 탈피(脫皮)

박정희시대 이래 우리나라의 과학입국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성공의 경험은 하나의 경로에 대한 ‘고착’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이제 경로를 바꿀 때가 됐다.

한 대선후보가 경로를 바꾸자고 제안해 신선하다. 국가가 계획을 세워 연구를 주도하는 방식에서 민간과 과학계가 계획을 세우고 국가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과 위주의 감사를 과정 위주의 감사로 바꾸고 실패해도 책임을 묻지 말자고도 했다. 각 부처마다 나뉘어져 있는 연구개발예산을 한 곳에 집중시켜 역동적으로 분배하자는 제안도 내놨다.

탈피(脫皮)는 게가 성장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낡은 껍질을 벗으면 새롭게 형성된 연한 껍질을 갖게 되는데 이때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쓴 탈피는 더 큰 성장의 결과로 이어진다. 59 대선이 대한민국 경로 탈피의 시작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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