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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을 가꾸며 땅의 의미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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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을 가꾸며 땅의 의미를 생각하다
  • 이환태
  • 승인 2017.04.02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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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태의 인문학여행] <7>펄 벅의 ‘대지’

도시의 빈터에는 어김없이 텃밭이 있다. 누구의 땅이랄 것도 없이 놀리는 땅이 있으면 누군가는 거기다가 푸성귀를 심는다. 어떤 곳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경고 푯말까지 세워뒀지만, 땅 주인이 그걸 갈아엎기 전까지는 끄떡도 않는다. 사실, 거기에 들이는 돈과 노력에 비하면 하찮은 소출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텃밭을 가꾼다. 그들은 마치 텃밭을 가꿈으로써 비로소 실존하는 것 같다.


텃밭 열풍은 도시생활의 공허함과 관련 있다. 도시인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허전하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해보지만 신통치 않다. 도시생활은 마치 잠시 농토를 버려둔 채 관광 온 농민의 마음과 같다고 할까? 좋은 것을 봐도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논밭에 가 있어 편치 않다. 천년만년 갈 것 같던 고대의 도시 바빌론처럼, 도시도 결국에는 땅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만, 정작 거기 사는 사람들은 땅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도시생활은 그래서 풍요 속의 빈곤이다. 우리는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소비를 하게 되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힘겹게 일한다. 어쩌다가 소비가 과하여 빚이라도 지게 되면, 그걸 갚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뜨거워진다. 그러나 텃밭을 가꾸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런 사람들은 엉뚱한 소비를 할 시간도 없을뿐더러 노동을 통해서 몸과 마음까지도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펄 벅(Pearl S. Buck)의 <대지>(大地, The Good Earth)는 20세기 초 중국을 배경으로 하여 땅과 인간의 관계를 그 어느 작품보다도 잘 그리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 왕룽(Wang Lung)은 큰 부자인 황 대인 집의 노예 오란(O-Lan)과 결혼한다. 여염집의 처녀를 데려올 형편이 아닌 왕룽의 아버지는 황 대인 집 노예 중 아주 평범해서 주인이나 그 자제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한 여자를 골라 며느리로 삼는데, 그게 바로 오란이다.


부지런하고 검소한 오란과 결혼하고 나서부터 왕룽의 형편은 조금씩 나아진다. 첫 아이를 낳고 황 대인 집으로 인사 갈 때에는 전에 멸시하던 하인들도 깜짝 놀랄 만큼 차림새가 달라진다. 반면에 전답을 작인(作人)들의 손에 맡긴 채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던 황 대인은 땅을 팔아서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왕룽은 그 땅을 사들여 농토를 조금씩 늘려간다.


그러다 혹심한 가뭄이 들어 더 이상 살 길이 막막해지는 일이 발생하고, 왕룽은 땅을 제외하고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아 남쪽의 도시로 이주한다. 그러나 도시에 농부를 위한 변변한 일자리가 있을 리 없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식구들은 구걸을 하고, 왕룽은 인력거를 끌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3년 동안의 그곳 생활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일 뿐,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할 길조차 막막하다. 왕룽은 심지어 자신의 딸을 팔아서라도 고향으로 가는 여비를 마련하려 한다.


그 절박한 때에 마침 폭동이 일어난다. 굶주린 사람들이 폭도로 변하여 부자들의 집을 약탈한다. 왕룽과 오란도 그 무리에 합류하여 어느 부자 집에서 돈과 패물을 훔쳐 나온다. 여비가 마련되자 주저함 없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미 가세(家勢)가 형편없이 기운 황 대인에게서 땅을 더 사들이고 농토를 관리할 사람도 고용한다. 그의 재산은 날로 늘어 이전의 황 대인보다 더 큰 부자가 된다. 홍수가 나서 한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끄떡없을 정도가 된다.


그러나 홍수로 들어찬 물이 빠지길 기다리는 동안 왕룽은 땅에서 멀어지면서, 전혀 딴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는 읍내의 찻집을 드나들면서 전족(纏足)한 연화(蓮花, Lotus Flower)라는 여인한테 빠지고 그녀를 첩으로 들인다. 그녀를 위해 새 집도 지어주고 온갖 귀한 것들을 사준다. 심지어는 오란이 고이 간직하고 있던 두 알의 진주까지도 빼앗아 그녀에게 주지만, 손에 흙 한번 묻힌 적 없는 연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던 중 아내 오란이 병들어 죽는다. 그녀의 죽음으로 왕룽은 비로소 제정신을 차리게 되지만, 오늘의 그를 있게 했던 오란은 이미 가고 없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위로는 땅뿐이다. 죽음이 임박했을 무렵 왕룽은 읍내에 있는 큰 집을 떠나 농지의 한 가운데에 있는 초라한 흙집에서 살면서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그가 죽고 나면 땅에서 일하기 싫어하는 그의 아들들이 그 땅을 모조리 팔아버리고, 그의 집안도 황 대인의 가문처럼 몰락할 것임을 이 소설은 암시한다.


영어의 인간(human)이란 말은 라틴어의 흙(humus)이란 말에서 나왔다. 우리는 흙에서 나왔고 흙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그걸 떠난 삶은 우리를 부유하게는 할지언정, 온전케 하지는 못한다.


나는 오늘도 도시의 빈터에서 종일토록 쪼그리고 앉아 그 초라한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지>의 등장인물들의 도덕성이 땅과의 친소(親疎) 여부에 따라 부침(浮沈)했던 것을 생각한다. 누구의 땅이든, 먹을거리를 키워낼 뿐만 아니라 사람을 건전하게도 해주는 땅은 이래저래 소중하다 아니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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