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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이 위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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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이 위대한 이유
  • 정은영
  • 승인 2017.01.30 1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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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영의 미술사산책] 천재와 예술가

“저는 천재적인 예술가보다 고민하는 예술가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책을 읽다가 마음을 움직인 문장이다. 특별히 대단할 것도 없는 얘기 같아 보이지만, 팔순을 훨씬 넘긴 어느 노(老) 화가가 젊은 미술학도들에게 전한 말이었다는 사실이 진한 감동을 주었다.


흔히 예술가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적어도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화가들은 뭔가 비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노 화가는 뛰어난 천재성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예술가보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회의하는 예술가가 진정한 예술가라는 소박한 진실을 진지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는 폴 세잔(Paul Czanne)을 바로 그런 화가라고 덧붙였다.


현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릴 뿐 아니라 가장 철학적인 화가 중의 하나로 꼽히는 폴 세잔이야말로 천재적인 예술가가 아닌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그림은 현대미술의 어느 작품보다도 지적(知的)이고 난해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의 회화가 현상학이라는 어려운 철학과 결부되어 거론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였다.


정작 화가 자신도 겨우 말년이 되어서야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회화가 지닌 혁명성 또한 그의 영향을 받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미술로 말미암아 비로소 진지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그가 당대에 이해되지 못한 불운한 천재였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보고 느끼는 자연을 그 자신이 보고 느끼는 그대로 그리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고 끊임없이 고민한 평범한 화가였다.

 

 


그가 위대한 것은, 이미 정해진 기법이나 양식으로는 자신의 체험을 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내기 위해 평생토록 노력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여타의 예술가들을 뛰어넘는 대단한 천재라기보다는 다른 화가들보다 좀 더 의심이 많았고 좀 더 자신에게 정직했으며 좀 더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잔의 정물은 상식적인 것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1899년경에 그려진 ‘커튼과 꽃무늬 물병이 있는 정물’은 언뜻 보면 전통적인 정물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잠시만 지나도 모든 것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평평하게 놓여 있어야 할 탁자의 한쪽 끝이 기이하게 치켜 올라가 있어 금방이라도 탁자 위의 물건들이 쏟아질 것 같은데다, 탁자의 앞 모서리마저 수평을 이루고 있지 않아 공간이 휘어진 듯 인상을 준다.


과일과 물병의 배치 역시 조화나 균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색한 구성이다. 커튼과 냅킨, 물병과 접시 사이에 별다른 질감의 차이가 없다. 과일의 테두리나 천의 윤곽선이 두드러지고 접시 아래의 그림자까지 딱딱하게 그려져 있어 결코 전통적인 회화에서와 같은 아름다운 환영(幻影)을 느끼기 어렵다.


어느 모로 보나 ‘잘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없는 이 그림은 마치 대상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그것을 알아가는 촉지적인 과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순간을 포착하는 인상주의적인 접근이나 시간성이 사라진 고전주의적인 화면으로는 자신이 느끼는 대상의 견고한 구조와 체험의 생생함을 담아낼 수 없다고 느꼈던 그는 오직 자신의 지각과 체험으로부터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의 그림이 지극히 감각적이면서도 견고한 실체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그는 아들 폴에게 이렇게 썼다. “이제야 자연을 좀 더 맑은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나의 이 감각을 그림으로 실현하는 것은 언제나 너무나 어렵구나. 내 감관에 펼쳐지는 그 강렬함에 도저히 도달할 수가 없다.” 폭풍우 속에서 풍경을 그리다 쓰러진 그는 결국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그 힘든 화가의 길을 결코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고향 엑상프로방스에서 그리고 또 그렸던 생 빅투아르 산의 풍경을 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세잔이 위대한 건 그가 비범한 천재여서가 아니라 죽는 날까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예술가였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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