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한지공예로 재탄생, 어두운 골목 비추는 詩
상태바
한지공예로 재탄생, 어두운 골목 비추는 詩
  • 한지혜 기자
  • 승인 2016.12.19 09:39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의 인물 인터뷰] 성배순 시인

수 백 겹 켜켜이 쌓아 올린 종이 위에 공들여 아로새긴 시. 이제껏 본 적 없던 필체에는 슬픔과 외로움, 때로는 애도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시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 몇 해를 넘기기도 한다는 성배순(52) 시인. 두 번째 시집이 7년 만에 나온 것은 어쩌면 곱씹고, 되뇌이고를 수 백 번 반복한 그의 고집, 그 세월 자체일 것이다.

한지와 시를 결합한 ‘시화 공예’의 개척자 성 시인이 세종시 고운동에 ‘세종갤러리’를 오픈했다. 프로와 아마추어 작가들을 대상으로 무료 대관, 상시 전시를 통해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같은 곳이 꾸며졌다. 지난 12일 세종갤러리의 첫 전시, ‘시와 한지공예의 만남’에서 그를 만났다.

백 번의 손길을 거치는 ‘한지’, 시와 닮다


전시된 작품들을 보고 ‘한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작품들은 때론 나무의 질감을, 때론 철의 질감을 내보이고 있기 때문. 

성 시인은 “작품에 시를 새기는 공정은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닌 거꾸로 탈색하는 과정”이라며 “수 백 장의 한지를 겹쳐 시를 새기고, 수 십 번의 세밀한 탈색을 통해 완성되는 작품”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나무의 껍질을 벗겨 삶고, 떠서 말리기를 반복하는 한지의 공정과 시 창작은 서로 닮아있다. 100번의 손길을 통해 탄생하는 한지는 결국 오랜 시간 고뇌를 거치는 시의 발화 과정과 비슷하다.

그는 “보통 시화전에서는 천 또는 종이를 활용하곤 하는데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고민 끝에 공방을 돌아다니다 한지공예를 알게 됐고, 자연에 가까운 은은한 색이 좋아 시작했다. 시를 쓰는 일이란 결국 백지인 나를 찾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해마다 시집을 내는 시인들도 있다지만, 내 경우는 시 한 편 쓰는 데 몇 달,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며 “특히 등단 작품인 ‘진혼제’의 경우가 그렇다. 물론 문학적으로 욕심을 내다보니 그렇게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성 시인은 2004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현재는 공주 문화예술촌 레지던스 입주작가로 건물 2층에 작업실을 두고 각종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세종갤러리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열린다. 세종시에서는 이미 올해 단체전을 통해 시화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고운동 갤러리 오픈… 문학과 예술이 숨쉬는 ‘아지트’ 공간


성배순 시인은 충남 연기군 서면 와촌리 출신이다. 와촌초등학교와 연서중학교를 졸업해 고등학교는 공주로 다녔다.

그는 “어떻게 보면 세종시 원주민으로서 세종시가 생기는 과정을 줄곧 봐왔던 사람”이라며 “산이 하나하나 없어지고, 건물이 올라서는 모습을 직접 봐와서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다.

그는 한국독서교육문화연구소장을 지내며 전국으로 독서 강연을 다녔다. 교원 연수를 비롯해 주부 독서자격과정 지도를 겸했고, 수 년 째 군부대와 교도소를 다니며 독서치료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그가 고향에서 카페와 펍 기능을 가미한 갤러리를 오픈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아마추어 작가들이 그림을 그려놓고 ‘장롱작품’으로 놔두는 것을 많이 봐왔다”며 “묵혀뒀던 작품들을 꺼내 전시도 하고, 찾아오는 작가들과 의견을 나누며 프로와 아마추어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구상하게 됐다”고 했다.

갤러리는 무료 대관으로 운영된다. 오픈전이 끝나면 내년 1월에는 아마추어 작가의 서양화 전시가, 3월에는 유명한 민화작가의 전시가 예정돼있다. 전시와 함께 향기로운 커피와 전통 차, 간단한 식사도 가능해 문화예술 관련 동호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독거노인·다문화여성·청년, 이 시대 어두운 계층 조명


‘꽃, 꽃, 잎, 잎, 들이 피기도 전에/갑자기 떨어졌다/깊은 바닥에 오랜 ‘세월’ 동안/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박혀있다/304개의 화인이다/진도 팽목항에 떠도는,’ (「다시, 4월」)

세월호 아이들을 소재로 한 작품은 갤러리 안쪽 벽면에 시화로 걸려있다. 당시 처음 캘리크라피를 배우며 어렵게 배웠던 글씨는 성 시인만의 서체로 정돈돼 주제마다 다른 감성을 보여준다.

그는 “세월호를 소재로 한 작품의 경우 ‘눈동자’를 소재로 글씨를 써내려갔다”며 “흘러내리는 눈물같이 표현한 자음과 서체의 느낌도 어두운 편에 속한다”고 했다. 시에 담긴 메시지와 소재에 따라 같은 서체라도 느낌이 달라지는 셈이다.

흔히 평론가들은 성 시인의 시를 ‘여성’과 ‘모성’으로 압축해 살피고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결국 성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왜곡된 모성’에 가깝다.

그는 “엄마들은 양면성을 통해 때론 호랑이 엄마가 돼야하지만, 장성한 아이들을 여전히 엄마 무릎 밑에 두고 키우곤 한다”며 “영웅 신화에서 영웅의 첫 번째 조건은 출가다. 우리 동화에서, 또 우리 사회에서 계모가 나오는 것 역시 이와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다”고 했다. 

작품을 통해 다문화 여성에 대한 시각도 엿볼 수 있다. 언젠가 서해안 신두리사구 해당화 보호구역에서 만난 예쁜 달맞이꽃에서 그는 대한민국 사회에 홀로 심어진 다문화여성을 읽어낸다. 병자호란 때 몽골로 끌려갔던 조선의 어린 여성들을 통해서는 21세기 국제결혼으로 몽골에서 시집온 여성을 투영하기도 한다.  

노인 독거사를 다룬 작품을 비롯해 청년층의 현실을 담은 작품도 인상 깊다. 서울에서 최고 인기라는 ‘루시드 드림’ 강연을 통해 현실도피를 꿈꾸는 청년층의 문제를 담았고, 실제 존재하는 솜방망이꽃과 켄타우로스 신화를 통해서는 잔혹한 범죄에도 가벼운 처벌을 고집하는 현 사회를 꼬집었다. 

성 시인은 “역사나 신화, 전설 등의 모티브에 관심이 많다”며 “시에는 외연과 내포가 있다. 현대 사회의 이야기를 역사와 연결짓다보니 상징을 알면 시는 더 재밌어진다”고 했다.

어두운 사회의 이면을 비추는 시, “시인은 작품으로 목소리 내야”


성 시인은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찾아 가는 문학캠프’ 활동을 이어왔다. 장애인시설을 비롯해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며 혼자 또는 단체로 수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당시 사람이 고팠던 할머니들이 꼬깃한 천 원짜리를 쥐어주기도 하고, 아껴두었던 모시 삼베옷을 입으라고 건네주시기도 했다”며 “어릴 적 썩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마음에서 행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골목 골목 어두운 곳을 비추는 것 역시 시인의 역할이다. 소수를 외면하지 않는 시를 쓰는 것. 가수는 노래로 말하고, 작가는 그림으로 말하듯이 시인은 작품으로서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앞으로도 쉽게 시를 쓰지는 못할 것 같지만, 나름대로 작품을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싶다”며 “꼭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서지 않더라도 각자 자기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빗대는 것일뿐, 결국 작품은 시인 스스로와 다를 바 없다. 결국 호랑이 엄마가 되지 못했던 성 시인이 ‘아무르 호랑이를 찾아서’라는 시를 썼듯이 수많은 자신들이 결국 사회를, 대한민국을 채우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작은 감동을 받았다면 그 감동이 파동으로 이어져 구석까지 닿으리라 생각한다”며 “앞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할 계획이다. 오픈한 갤러리는 프로든 아마추어든 묵혀두었던 목소리를 꺼내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시처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마(半人半馬), 난폭한 켄타우로스 같은 세상. 그러나 아직 그곳에는 여전히 골목골목을 누비는 외로운 시인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부 2016-12-14 15:46:08
시 창작 교실을 여시면 어떨까요?

2016-12-13 22:49:40
작품도 멋진데 그 속에 들어있는 뜻을 알고나니 더 멋지네요
언제 들러봐야겠어요^^

순시리 2016-12-13 21:16:26
기자님 필력이 대단하십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